.과거나 미래 쪽에 한눈을 팔면
현재의 삶이 소멸해 버린다.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항상 현재일 뿐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다면
여기에는 삶과 죽음의 두려움도 발붙일 수 없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라.
.침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에게
신뢰가 간다.
초면이든 구면이든
말이 많은 사람한테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생각을 전부 말해 버리면 말의 의미가,
말의 무게가 여물지 않는다.
말의 무게가 없는 언어는
상대방에게 메아리가 없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 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살 때는 삶에 전력을 기울여 뻐근하게 살아야 하고,
일단 삶이 다하면 미련없이 선뜻 버리고 떠나야 한다.
.행복이란, 밖에서 오는 행복도 있겠지만
안에서 향기처럼, 꽃향기처럼 피어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하루 한 순간만이라도
순수하게 홀로 있는 시간을 갖는다면
삶의 질이 달라질 것이다.
.세상일이란, 내 자신이 지금 당장 격고 있을 때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지내 놓고 보면 그때 그곳에 그 나름의 이유와
의미가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오늘 우리가 격는 온갖 고통과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의지적인 노력은
다른 한편, 이 다음에 새로운 열매가 될 것이다.
이 어려움을 어떤 방법으로 극복하는가에 따라
미래의 우리 모습은 결정된다.
.수행자는 기도로써 영혼의 양식을 삼는다.
기도는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재산이다.
사람의 이성과 지성을 가지고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기도가 우리를 도와준다.
.기도는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간절한 소망이다.
따라서 기도에는 목소리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 담겨야 한다.
진실이 담기지 않은 말은 그 울림이 없기 때문이다.
기도에 필요한 것은 침묵이다.
말은 생각을 일으키고 정신을 흐뜨려 놓는다.
.어떤 생각을 가슴속 깊은 곳에 은밀히 간직해 두면
그것이 씨앗이 되어 싹이 트고 잎이 펼쳐지다가
마침내는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씨앗은 쭉정이로 그칠 뿐,
하나의 씨앗이 열매를 이룰 때
그 씨앗은 세월을 뛰어넘어 새로운 씨앗으로 거듭난다.
.누가 내 삶을 만들어 주는가.
내가 내 삶을 만들어 갈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다.
저마다 자기 그림자를 거느리고
휘적휘적 지평선 위를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에 충실할 때
그런 자기 자신과 함께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
.사람은 저마다 홀로 자기 세계를 가꾸면서
공유하는 만남이 있어야 한다.
"한 가락에 떨면서도 따로 따로 떨어져 있는 거문고 줄처럼" 그런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거문고 줄은 서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울리는 것이지
함께 붙어 있으면 소리를 낼 수 없다.
공유하는 영역이 너무 넓으면 다시 범속에 떨어진다.
.따뜻한 마음이 고였을 때,
그리움이 가득 넘치려고 할 때,
영혼의 향기가 배어 있을 때 친구도 만나야 한다.
습관적으로 만나면 우정도 행복도 쌓이지 않는다.
.자기관리를 위해 내 삶이 새로워져야 겠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하게 된다.
할수만 있다면 유서를 남기는 듯한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읽히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삶의 진실을 담고 싶다.
.그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생의 소박한 기쁨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을 살 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모자람이 아니고 가득 참이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 '고
순간 순간 자각하라.
이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이런 순간들이 쌓여 한 생애를 이룬다.
.너무 긴장하지 말라.
너무 긴장하면 탄력을 잃게 되고
한결같이 꾸준히 나아가기도 어렵다.
사는 일이 즐거워야 한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혼자 사는 사람들만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 누구나
자기 그림다를 이끌고 살나가고 있으며,
자기 그림자를 되돌아보면
다 외롭기 마련이다.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생각이 맑고 고요하면
말도 맑고 고요하게 나온다.
그가 하는 말고써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말은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어려운 일도
어떤 즐거운 일도 영원하지 않다.
모두 한때이다.
.삶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일이다.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내 자신이 몹시 초라하고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 앞에 섰을 때는 결코 아니다.
나보다 훨씬 적게 가졌어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 당당함을 잃지 않는
그런 사람 앞에 섰을 때이다.
.마음이 맑고 투명해야 평온과 안정을 갖는다.
마음의 평화와 안정이야말로
행복과 자유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참된 앎이란
타인에게서 빌려온 지식이 아니라
내 자신이 몸소 부딪쳐
체험한 것이어야 한다.
다른 무엇을 거쳐 아는 것은
기억이지 앎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안 것을
내가 긁어모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 것이 될 수 없다.
.친구 사이의 만남에는 서로 영혼의 울림을
주고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너무 자주 만나게 되면 어느 쪽이나 그 무게를
축적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만남에는 그리움이 따라야 한다.
그리움이 따르지 않는 만남은
이내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마음의 그림자처럼 함께할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좋은 친구다.
.녹의 쇠에서 생긴 것인데 점점 그 쇠를 먹는다.
이와 같이 마음이 그늘지면
그 사람 자신이 녹슬고 만다.
온전한 인간이 되려면
내 마음을 내가 쓸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의 그늘 : 걱정, 시기, 욕심, 증오, 불안 초조...)
.빛방울이 연잎에 고이면
연잎은 한동안 물방울의 유동으로 일렁이다가
어느 만큼 고이면
수정처럼 투명한 물을 미련없이 쏟아 버린다.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무게만을 싣고 가다가
그 이상이 되면 비워 버리는 구나'하고
그 지혜에 감탄했었다.
그렇지 않고 욕심대로 받아들이면
마침내 잎이 찢기거나 줄기가 꺽이고 말 것이다.
세상 사는 이치도 이와 마찬가지다.
.풀과 나무들은
저마다 자기다운 꽃을 피우고 있다.
그 누구도 닮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 풀이 지닌 특성과
그 나무가 지닌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눈부신 조화를 이루고 있다.
풀과 나무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생명의 신비를 꽃 피운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자신들의 분수에 맞도록 열어 보인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그가 서 있는 자리마다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리라.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불행해진다.
.일 없는 사람이 귀한 사람이다.
다만 억지로 꾸미지 말라.
있는 그대로가 좋다.
'일 없는 사람'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이 아니다.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그 일에 빠져들지 않는 사람,
일에 눈 멀지 않고
그 일을 통해 자유로워진 사람을 말한다.
.삶에는 즐거움이 따라야 한다.
즐거움이 없으면 그곳에는 삶이 정착되지 않는다.
즐거움은 밖에서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인생관을 지니고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일상적인 사소한 일을 거치면서
고마움과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
.가을날 오후의 한때
빈방에 홀로 앉아
새로 바른 창호에 비치는
맑고 포근한 햇살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아주 넉넉하다.
이런 맑고 투명한 삶의 여백으로 인해
나는 새삼스레 행복해지려고 한다.
.현대인의 불행은 모자람이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다.
모자람이 채워지면 고마움과 만족함을 알지만
넘침에는 고마움과 만족이 따르지 않는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가진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잃어 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존재는 그 누구에게도,
그 어디에도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이다.
살아 있을 때
다른 존재들과 따뜻한 가슴을 나누어야 한다.
.만남은 시절 인연이 와야 이루어 진다고 한다.
그 이전에 만날 수 있는
씨앗이나 요인은 다 갖추어져 있었지만
시절이 맞지 않으면 만나지 못한다.
마음과 마음이 접촉될 때
하나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마음이 열리면 사람과 세상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우리들이 화를 내고 속상해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외부의 자극에서라기 보다
마음을 걷잡을 수 없는 데에 그 까닭이 있다.
인간의 마음이란 미묘하기 짝이 없어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여유조차 없다.
그런 마음을 돌이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고
옛 사람들은 말한 것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내일 일을 누가 아는가.
이 다음 순간을 누가 아는가.
순간순간을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매 순간을 자기 영혼을 가꾸는 일에.
자기 영혼을 맑게 하는 일에 쓸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늙는다.
그리고 언젠가 자기 차례가 오면 죽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늙음이나 죽음이 아니다. 녹슨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삶이 녹슬면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살든
그 속에서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물이 흘러야 막히지 않고
팍팍하지 않으며, 침체되지 않는다.
.살 만큼 살다가 삶의 종점에 다다랐을 때
내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원전적으로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때 맡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물질이든 명예든.
진정으로 내 것이 있다면 내가 이곳을 떠난 뒤에도
전과 다름없이 이곳에 남아 있는 것들이어야 한다.
내가 평소 타인에게 나눈 친절과
따뜻한 마음씨로 쌓아 올린 덕행만이
진정으로 내 것이 될 수 있다.
나누는 일을 다음으로 미루지 말라.
.소유 지향적인 삶과 존재 지향적인 삶은
우리들 일상에 두루 깔려 있다.
거기에는 그 나름의 살아가는 기쁨이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 이르렀을 때,
어느 쪽 삶이 우리가 기대어 살아갈 만한 삶이며,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삶인가 뚜렸이 드러난다.
똑 같은 조건을 두고
한쪽에서는 삶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근심 걱정의 원인으로 본다.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크고 많은 것에서 보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있다.
크고 많은 것을 원하면 그 욕망을 채울 길이 없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스며 있다.
.살아 있는 꽃이라면
어제 핀 꽃과 오늘 핀 꽃은 다르다.
새로운 향기와 새로운 빛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일단 어딘가에 집착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안주하면
그 웅덩이에 갇히고 만다.
그러면 마치 고여 있는 물처럼 썩기 마련이다.
.홀로 있지 못하면 삶의 전체적인 리듬을 잃는다.
홀로 조용히 사유하는,
마음을 텅 비우고 무심히 지켜보는 그런 시간이 없다면
전체적인 삶의 리듬 같은 것이 사라진다.
삶의 탄혁을 잃게 된다.
.단순한 삶을 이루려면
더러는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홀로 있을 때 단순해지고 순수해진다.
이때 명상의 문이 열린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순수하며 자유롭고,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당당하게 있음이다.
.남을 미워하면 저쪽이 미워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미워진다.
부정적인 감정이나 미운 생각을 지니고 살아가면,
그 피해자는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가면
내 삶 자체가 얼룩지고 만다.
미워하는 것도 내 마음이고,
좋아하는 것도 내 마음에 달린 일이다.
.저마다 이 세상에 자기 짐을 지고 나온다.
그 짐마다 무게가 다르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나온 사람은
남들이 넘겨볼 수 없는 짐을 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그 인생이다.
자신에게 어떤 걱정과 근심거리가 있다면
회피해선 않된다.
그걸 딛고 일어서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그리운 사람이다.
그리워하면서도 만날 수 없으면 삶에 그늘이 진다.
그리움이 따르지 않는 만남은 지극히 사무적인
마주침이거나 잉상적인 스치고 지나감이다.
마주침과 스치고 지나감에는
영혼의 울림이 없다.
영혼의 울림이 없으면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다.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차다.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은 침묵을 익힌다는 말이다.
침묵은 자기 내면의 바다이다.
진실한 말은 내면의 바다에서 자란다.
듣는다는 것은 바깥 것을 매개로
자기 안에 잠들어 있는 소리를 깨우는 일이다.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사람은
그 말에서 자기 존재를 발견한다.
그러나 자기 말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기 일쑤다.
.별들이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남한테 전하려면
그것에 필요한 말이 우리 안에서 먼저 자라야 한다.
말이 되기까지는 우리들 안에서
씨앗처럼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듣는다는 것은
자기 것을 바우기 위해 침묵을 익히는 기간이다.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소유를 당하는 것이며,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무엇인가를 가질 때
우리의 정신은 그 만큼 부자유해지며
타인에게 시기심과 질투와 대립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소유물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소유해 버린다.
그러므로 필요에 따라 살아야지
욕망에 따라 살지 말아야 한다.
욕망과 필요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그 나름으로 움직이고 흐른다.
강물이 흐르고 바다가 출렁이는 것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묵묵히 서 있는 나무들도 움직이면서
안으로 끊임없이 수액을 돌게 한다.
해가 뜨고 지는 거나, 달이 찼다가 기우는 것도
해와 달이 살아 있어 그런 작용을 한다.
우주의 호흡과 같은 이런 움직임과 흐름이 없다면
인간 또한 살아갈 수 없다.
이 세상에서 멈추거나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멈춤과 고정됨은 곧 죽음을 뜻한다.
모든 것은 변화를 거치면서 살아 움직인다.
이런 변화와 움직임을 통해
새롭고 신선한 삶을 이룰 수 있다.
.사람 마음의 바탕은 선도 악도 아니다.
선과 악은 인연에 따라 일어날 뿐.
선한 인연을 만나면 마음이 선해지고
나쁜 인연을 만나면 마음이 악해진다.
안개 속에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옷이 젖듯이.
.우리에게 대지는 영원한 모성이다.
흙에서 음식물을 길러내고, 그위에다 집을 짓는다.
그위를 직립 보행하면서 살다가
마침내는 그 흙에 누워 삭아지고 마는 것이
우리들 삶의 방식이다.
흙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인간의 마음은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정결해지고 평온해진다.
.집착은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든다.
해탈이란, 온갖 얽힘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자재의 경지를 말한다.
그런데 그 얽힘의 원인은 다른데 있지 않고 집착에 있다.
물건에 대한 집착보다도 인정에 대한 집착은
몇 곱절 더 질기다.
출가는 그러한 집착의 집에서 떠남을 뜻한다.
.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생에 집착하고 삶을 소유로 여기기 때문이다.
생에 대한 집착과 소유의 관념에서 놓여날 수 있다면
엄연한 우주 질서 앞에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새롭게 시작하기위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것이므로.
.물소리에 귀를 모으라.
그것은 우주의 맥박이고 세월이 흘러가는 소리다.
우리가 살 만큼 살다가
갈 곳이 어디인가를 깨우쳐 주는
소리 없는 소리다.
.내일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이미 오늘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오늘을 마음껏 살고 있다면
내일의 걱정 근심을
가불해 쓸 이유가 어디 있는가.
.새싹을 틔우고, 잎을 펼치고, 열매를 맺고
그러다가 때가 오면 훨훨 벗어 버리고
빈 몸으로 겨울 하늘 아래
당당하게 서 있는 나무.
나무처럼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거저것 복잡한 분별없이
단순하고 담백하고 무심히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산을 찿는 것은
산이 거기 그렇게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산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어
언제나 우리들을 설레게 하기 때문이다.
인적이 미치지 않는 심산의 산승에게는
혼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얽어매지 못할 것이다.
홀로 있다는 것은 순수한 내가 있는 것.
자유는 홀로 있음을 뜻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심산에 혼자있을 때 자유보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평등한 성품에는 나와 남이 없고,
큰 거울에는 멀고 가까움이 없다.
그 평등한 성품과 큰 거울은
어디에서 찿아야 할 것인가.
남의 말에 귀 기울이거나 밖으로 헛눈 팔지 않고,
자기 자신을 투철히 관찰할 때
평등한 성품과 그 큰 거울은
저절로 드러난다.
.무학이란 말이 있다.
전혀 배움이 없거나 배우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많이 배웠으면서도 배운 자취가 없음을 가리킴이다.
학문이나 지식을 코에 걸지 말고
지식 과잉에서 오는 관념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지식이나 전보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생기 넘치는 삶이 소중하다는 말이다.
지식이 인격과 단절될 때
그 지식인은 가짜요, 위선자다.
우리는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다.
우리는 끌려가는 짐승이 아니라
신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야 할 인간이다.
.사람의 마음은 그 어디에도 얽매임 없이
순수하게 집중하고 몰입할 때
저절로 평온해지고 맑고 투명해진다.
명상은 우리들 삶의 일부분이다.
명상은 안팎으로 지켜보는 일이다.
흘러가는 강물을 강둑 위에서 묵묵히 바라보듯이
그저 지켜볼 뿐이다.
명상은 소리없는 음악과 같다.
명상은 흐르는 강물처럼 늘 새롭다.
명상하라, 그 힘으로 삶을 다지라.
.명상은 마음을 열고, 귀 귀울이고 바라봄이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들끓는 번뇌를 내려놓고,
빛과 소리에 무심히 마음을 열고 있으면
잔잔한 평안과 기쁨이 그 안에 있다.
깨달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꽃피어남이다.
진정한 앎은 말 이전의 침묵에서 그 움이 튼다.
밖에서 찿으려고 하지 말라.
저마다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일이다.
그 귀 기울임에서 새로운 삶을 열어야 한다.
.모든 것은 있을 자리에 있어야 살아서 숨쉰다.
.살 때는 삶에 철저해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해 그 전부가 죽어야 한다.
삶에 철저할 때는 조금도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일단 죽게 되면 전혀 삶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된다.
사는 것도 내 자신의 일이고,
죽음 또한 내 자신의 일이니
살 때는 철저히 살고,
죽을 때 또한 철저히 죽을 수 있어야 한다.
생과 사를 물을 것 없이, 그때 그때의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이 불교의 생사관이다.
우리가 순간 순간을 산다는 것은
한편으론 순간순간 죽어 간다는 것이다.
현자는 삶에 대해서 생각하지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지켜보기만 하라.
지켜보는 사람은 언덕위에 골짜기를 내려다보듯
그 대상으로부터 초월해 있다.
지켜보는 동안은
이렇다 저렇다 조금도 판단하지 말라.
강물이 흘러가듯 그렇게 지켜보라.
그리고 받아들이라.
어느 것 하나 거역하지 말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
그 받아들임 안에서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본래의 자기 자신과 마주하라.
.무심코 하는 말이든, 뜻을 담은 말이든
듣는 귀가 바로 곁에 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은 곧
그 사람의 속뜰을 열어 보임이다.
그 말을 통해 겹겹으로 닫힌
그의 내면 세계를 알 수 있다.
일상에 때 묻고 닳은 자기 자신을
그 어느 때 그 무엇으로 회복할 것인가.
입 다물고 귀 기울이는 습관을 익히라.
.개인의 생애로 볼 때
이 사람과 이 한때를 갖는 이것이
생애에서 단 한 번의 기회라고 여긴다면
순간순간을 뜻 깊게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몇번이고 만날 수 있다면 범속해지기 쉽지만,
이것이 처음이면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아무렇게나 스치고 지나칠 수 없다.
기회란 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번 놓치면 다시 돌이키기 어렵다.
.용서는 가장 큰 수행이다.
남을 용서함으로써 나 자신이 용서 받는다.
날마다 새로운 날이다.
묵은 수렁에 갇혀 새날을 등지면 안 된다.
맺힌 것을 풀고 자유로워지면 세상 문도 활짝 열린다.
.우주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이다.
우리는 서로서로 때문에 존재한다.
서로가 서로의 한 부분이다.
증오라는 원한의 칼로 남을 해치려고 한다면
그 칼이 자기 자신을 먼저 찌르지 않고는
맞은편에 닿을 수 없다.
.개체와 전체의 관계는
조화와 균형으로 이루어질 때 가장 바람직하다.
이 조화와 균형이 깨지면 이변이 생긴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와 균형이 무너져
오늘날의 지구는 온갖 환경 재난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 덕분에
숨을 쉬며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흙, 공기, 물, 바람, 햇빛 / 전기, 상하수도, 돈, 음식물)
.누가 나를 추켜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낼 일도 못된다.
그건 모두가 한쪽만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이다.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가 아닌가.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달린 것이다.
실상은 말 밖에 있는 것이고
진리는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는다.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이다.
. 우리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고 있다.
바로 지금이지 그때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다음 순간을, 내일 일을 누가 알 수 있는가.
겨울가고 봄이 오니 해가 바뀐 듯 하지만
보라.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명상은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사물의 실상을 지켜보고 내면의 흐름을, 생각의 실상을
고요히 지켜보는 일이다.
지식은 기억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지혜는 명상으로부터 온다.
지식은 밖에서 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움튼다.
안으로 마음의 흐름을 살피는 일,
이것을 일과 삼아 해야 한다.
모든 것이 최초의 한 생각에서 싹튼다.
이 최초의 한 생각을 지켜보는 것이 바로 명상이다.
명상은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이다.
안으로 충만해지려면 맑고 투명한 자신의 내면을
무심히 들여다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명상은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훈련이다.
마음을 활짝 열기 위해 겹겹으로 둘러싸인,
겹겹으로 얽혀 있는 내 마음을 활짝 열기 위해
무심히 주시하는 일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오직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의 길이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매 순간 개선하고 심화시켜가는 명상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다.
이 지혜와 자비의 길을 통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지녀 온
불성과 영성의 씨앗이 맑고 향기롭게 꽃피어난다.
본래 청정한 우리 마음을 명상과 나눔으로 맑혀야 한다.
사랑이 우리 가슴 속에 싹트는 순간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진정한 탄생이고 부활이다.
.우리들 생애의 저녁에 이르면, 우리는 얼마나
타인을 사랑했는가를 놓고 심판 받을 것이다.
감정은 소유되지만 사랑은 우러난다.
감정은 인간 안에 깃들지만, 인간은 사랑 안에서 자란다.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곧 자기를 잊어버림이다.
자기를 잊어버림은 자기를 텅 비우는 일.
자기를 텅 비울 때
비로소 체험의 세계와 하나가 되어
그 어떤 것과도 대립하지 않고
해탈된 자기를 알게 된다.
해탈된 자기란 본래적인 자기,
부분이 아닌 전체인 자기를 가리킴이다.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너는 네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는가?'
마르틴 부버가 인산의 길에서 한 말이다.
때때로 이런 물음으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안으로 살피는 일에 소홀하면
기계적인 무표정한 인간으로 굳어지기 쉽고,
동물적인 속성만 쌓여 가면서
삶의 전체적인 리듬을 잃어버린다.
우리가 같은 생물이면서도 사람일 수 있는 것은
자기 삶을 스스로 되돌아보면서
반성할 수 있는 그런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한 믿음을 갖고 삶을 신뢰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흔들림이 없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근거없이 떠도는 말에 좌우됨이 없다.
가짜에 속지 않을 뿐더러, 진짜를 만나더라도
거기에 얽매이거나 현옥되지 않는다.
그는 비본질적인 일에 한눈을 팔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세상을 사는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지 때때로 헤아려 본다.
자기 삶의 질서를 지니고 사는 자주적인 인간은
남의 말에 팔리지 않는다.
누가 귀에 거슬리는 비난을 하든, 달콤한 칭찬을 하든,
그것은 그와는 상관이 없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지나가는 한때의 바람이다.
그는 일시적인 바람에 속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을 향해서 화내고 즐거워한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허수아비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타율에 의해 억지로 참는 일이 아니다.
자기를 지키는 것은 곧 자신의 질서이다.
그리고 자기 삶의 양식이다.
자신의 질서요, 삶의 양식이기 때문에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남을 괴롭힐 수 없으며,
또한 남한테서 괴로움을 받을 일도 없다.
사물을 내 스스로 보지 못하고, 남의 눈으로 보아 온
그릇된 버릇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눈이 열려야 열린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잎이 져버린 빈 가지에 생겨난 설화를 보고 있으면,
텅빈 충만감이 차오른다.
아무것도 지닌 것 없는 빈 가지이기에
거기, 아름다운 눈꽃이 피어난 것이다.
잎이 달린 나무에서는
그런 아름다움을 찿아보기 어렵다.
거기에는 이미 매달려 있는 것들이 있어서
더 보탤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만난다는 것은 곧 눈뜸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세계가 새롭게 열리고
생명의 줄기가 푸르게 용솟음 친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비로소 인식하는 것이다.
산문적인 시정의 거리에는
저마다 누구를 만나러 감인지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따르지 않는 것은
다만 마주치는 것이요, 사교일 따름이다.
만나는 데는 구도자적인 엄숙한 자세가 있어야 한다.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삶을 이루어 나갈 것인가?
나 하나를 어쩌지 못해 몇 밤이고
뜬눈으로 밝히는 그러한 사람만이 만날 수 있다.
만난 사람은 그때부터 혼자가 아니다.
그는 맑게 맑게 그리고 깊게 깊게 승화한다.
.거죽은 언젠가 늙고 허물어 진다.
그러나 중심은 늘 새롭다.
영혼에는 나이가 없다.
영혼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런 빛이다.
어떻게 늙는가가 중요하다.
자기 인생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중요하다.
거죽에서 살지 않고 중심에서 사는 사람은
어떤 세월 속에서도 시들거나 허물어지지 않는다.
.살아있는 것은 끝없이 변화하면서
거듭거듭 형성되어 간다.
봄이 가고,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그와 같이 순환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우주의 호흡이며 율동이다.
그러므로 지나가는 세월을 아쉬워할 게 아니라,
오는 세월을 잘 쓸 줄 아는 삶의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채우려고만 하는 생각을 일단 놓아버리고 텅 비울때,
새로운 눈이 뜨이고 밝은 귀가 열릴 수 있다.
존재의 실상을 인식하려면,
눈에 보이는 부분과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두루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육지를 바로 보려면, 바다도 함께 보아야 하고
밝은 것을 보려면,
어두운 곳도 동시에 볼 줄 알아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에 들어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텅빈 공간 속에서 순수한 현재를 발견할 수 있음을.
아무것도 없는 이 텅 빈 고요.
이런 텅빈 현재와 고요 속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
.늘 가까이 있어도 눈 속의 눈으로 보이는,
눈을 감을수록 더욱 뚜렷이 나타나는 모습이
뒷모습이다.
이 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
그리고 이 뒷모습을 볼 줄 아는 눈을 길러야 한다.
앞모습은 허상이고 뒷모습이야말로 실상이기 때문이다.
.선이란
밖에서 얻어들은 지식이나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스스로 깨닫는 일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것,
철저한 자기 응시를 통해 자기 안에 잠들어 있는
무한한 창조력을 일깨우는 작업이다.
그래서 선을 가리켜 지식이 아니라 체험이라고 했다.
이 무한한 창조력이
사랑이라는 온도와 지혜라는 빛으로써
타인을 향해 발휘될 때
선은 일상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산에 오르면 사람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무의미한 말의 장난에서 벗어나
입 다물고 자연의 일부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밖으로만 향했던 눈과 귀와 생각을
안으로 거두어들여야 한다.
그저 열린 마음으로 무심히 둘레를 바라보면서
쉬어야 한다.
복잡한 생각은 내려놓고 가장 편한 마음으로
자연의 숨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자연은 때 묻고 지친 사람들을 맑혀주고
쉬도록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 품안에 가까이 다가가 안기기만 하면 된다.
.함께 있고 싶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일 뿐,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사람은 누구나 홀로 태어난다.
그리고 죽을 때도 혼자서 죽어간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도
혼자서 살 수 밖에 없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도 저마다 홀로 서 있듯이,
인간 역시 무한 고독의 존재이다.
사람은 저마다 업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을 따로 해야하고, 행동도 같이 할 수 없다.
인연에 따라 모였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게 마련이다.
물론 인연의 주재자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다.
늘 함께 있고 싶은 희망 사항이 지속되려면,
서로를 들여다보려고만 하는 시선을
같은 방향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서로 얽어매기 보다는 혼자 있게 할 일이다.
현악기의 줄들이 한 곡조에 울리면서도
그 줄은 따로이듯이 그런 떨어짐이 있어야 한다.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산마루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 속뜰에서는 맑은 수액이 흐르고
향기로운 꽃이 피어난다.
혼자서 묵묵히 숲을 내다보고 있을 때,
내 자신도 한 그루 정정한 나무가 된다.
아무 생각없이 빈 마음으로 자연을 대하고 있으면,
그저 넉넉하고 충만할 뿐, 결코 무료하지 않다.
이런 시간에 나는 무엇엔가
그지없이 감사드리고 싶어진다.
하루 스물네 시간 중 맑고 잔잔한 이런 여백이 없다면,
내 삶은 탄력을 잃고 이내 시들고 말 것이다.
.지식이 지혜로 깊어지려면 순수한 집중을 통해
생의 밀도를 의식해야 한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응시함으로써
자기 존재에 대해 자각해야 한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자기 자신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던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외부의 정보에서 벗어나
자기 마음속 소리를 들어야 한다.
홀로 있는 시간은
본래의 자기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이다.
벌거벗은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기이다.
하루하루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비춰볼 수 있는 거울 앞이다.
그리고 내 영혼의 무게가 얼마쯤 나가는지
달아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이기도 하다.
.단순과 간소는 다른 말로 하면 침묵의 세계이다.
또한 텅빈 공의 세계이다.
텅 빈 충만의 경지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이 이 단순과 간소에 있다.
인간은 흔히 무엇이든 넘치도록 가득 채우려고만 하지
텅 비우려고 하지 않는다.
텅 비어야 그 안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우리는 비울 줄을 모르고 가진 것에 집착한다.
텅 비어야 새로운 것이 들어찬다.
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진정으로 거기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극락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 있음이다.
어제나 내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자리에 있음이다.
우리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남을 뜻한다.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아 차릴 때,
죽음은 결코 삶과 낯설지 않다.
우리는 죽음 없이는 살 수 없다.
순간순간 심리적으로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삶을 이룰 수 없다.
오늘이 어제의 연속이 아니라 새날이요,
새 아침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행복은 단순한 데 있다.
행복하려면 조촐한 삶과
드높은 영혼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내 정신이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있는 사람만이 자기 몫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
자기 분수를 헤아려 삶의 질을 높여 갈 수 있다.
.죽음은 과일 속에 들어있는 씨앗처럼
삶과 함께 살아간다.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생에 대한 깊은 존경과 성실성도 잃지 않는다.
생명이 지닌 밝고 아름답고 선한 가능성을 일깨우지
않고, 자기 한 몸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동물들과 다르지 않다.
'오늘의 나는 무엇인가'를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나답게 살고 있는가?
내가 허락 받은 목숨은 가뭄으로 잦아드는 논물과 같다.
.인연이란, 마음밭에 씨 뿌리는 것과 같아서
그 씨앗에서 새로운 움이 트고, 잎이 펼쳐진다.
인연이란, 이렇듯 미묘한 얽힘이다.
.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