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과일 속에 들어있는 씨앗처럼
삶과 함께 살아간다.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생에 대한 깊은 존경과 성실성도 잃지 않는다.
생명이 지닌 밝고 아름답고 선한 가능성을 일깨우지
않고, 자기 한 몸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동물들과 다르지 않다.
'오늘의 나는 무엇인가'를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나답게 살고 있는가?
내가 허락 받은 목숨은 가뭄으로 잦아드는 논물과 같다.
.인연이란, 마음밭에 씨 뿌리는 것과 같아서
그 씨앗에서 새로운 움이 트고, 잎이 펼쳐진다.
인연이란, 이렇듯 미묘한 얽힘이다.
.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이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순간마다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늘 변하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남을 판단할 수 없고,
심판할 수가 없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렸을 때
그는 이미 딴 사람이 되어 있을 수 있다.
말로 비난하는 버릇을 버려야
우리 안에서 사랑의 능력이 자란다.
이 사랑의 능력을 통해 생명과 행복의 싹이 움튼다.
.사람의 손이 빚어낸 문명은 직선이다.
그러나 본래의 자연은 곡선이다.
인생의 길도 곡선이다.
직선은 조급, 냉혹,비정함이 특징이지만
곡선은 여유, 인정, 운치가 속성이다.
주어진 상황 안에서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찿는 것,
그것 역시 곡선의 묘미이다.
때로는 천천히 돌아가기도 하고 어정거리고
길 잃고 헤매면서
목적이 아니라 과정을 충실히 깨닫고 사는
삶의 기술이 필요하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이것이 세상 사는 지혜의 전부이다.
.텅 빈 항아리와 아무것도 올려 있지 않은
빈 가반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마음도 어느새 텅 비게 된다.
무념 무상, 무엇인가를 채웠을 때보다 비웠을 때의
이 충만감을 진공묘유라고 했던가.
텅 빈 충만의 경지를 빈 그릇에서 배운다.
.서로의 향기로써 대화를 나누는 꽃에 비해
인간은 말이나 숨결로써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꽃이 훨씬 우아한 방법으로 서로를 느낀다.
어떤 대상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그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이쪽에서 따뜻한 마음을 열어 보여야
저쪽 마음도 열린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서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숲이나 나무 그늘에 들면
착해지려고 한다.
인간의 배경은 소음과 먼지에 싸여 피곤하기만 한
도시의 문명일 수 없다.
나무와 새와 물과 구름, 그리고 별들이 수놓인
의연한 자연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자연으로부터
그 질서와 겸허와 미덕을 배워야 한다.
.눈 속에 꽃을 찾아가는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꽃다운 것인가.
맑고 향기롭게 피어 있는 꽃의 아름다움을
즐길 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도 이런 맑음과
향기와 운치가 있는지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자기를 가둔 감옥에서 탈출하려면
무엇보다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
자기 인생에 대한 각성 없이는 벗어날 기약이 없다.
깨어 있는 사람만이 자시 몫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끝없는 탈출을 시도한다.
참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욕구를 충족시키는 생활이 아니라
의미를 채우는 삶이어야 한다.
의미를 채우지 않으면 삶은 빈 껍질이다.
.만일 이 산이 내 소유라면, 그 소유 관념으로 인해
잔잔한 기쁨과 충만한 여유를 즉각 반납하게 될 것이다.
다행이도 이 산은 내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 놓고 바라볼 수 있고, 내 뜰처럼 즐길 수 있다.
차지하는 것과 보고 즐기는 것은
이처럼 그 틀이 다르다.
.진정한 알몸은 어떤 옷이든
마음대로 입었다 벗었다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어떤 연장이든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을 '경계를 타는 사람'이라고 한다.
어떤 결함도 없는 완전한 인간이란
완전이라고 하는 데에도 머물지 않는 사람이다.
완전이란 이미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라
시시각각 새로운 창조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내 마음이 따뜻해지고 풋풋해지고
더 자비스러워지고
상대방이 좋아할 게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고통이 따른다.
누구나 자기 집에 좋은 그림 걸어두고 싶어하지만,
일주일 정도 지나면
거기 그림이 있는지도 잊어버린다.
소유란 그런 것이다.
손 안에 넣는 순간, 흥미가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단지 바라보는 것은 아무 부담없이 보면서,
오래도록 즐길 수 있다.
소유로 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사랑도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창조하는 일,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자신을 만들어 간다.
이 창조의 노력이 멎을 때,
나무든 사람이든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온다.
겉으로 보기에 나무들은
표정을 잃은 채 덤덤히 서 있는 것 같지만
안으로는 잠시도 창조의 손을 멈추지 않는다.
땅의 은밀한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새봄의 싹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시절 인연이 오면, 안으로 다스리던 생명력을
대지 위에 활짝 펼쳐 보일 것이다.
.자연은 우리 인간에게 영원한 어머니일 뿐 아니라
위대한 교사이다.
자연에는 그 나름의 뚜렸한 질서가 있다.
자연은 말없이 우리에게 많은 깨우침을 준다.
자연 앞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 같은 것은 접어 두어야 한다.
그래야 침묵 속에서 우주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
침묵이야말로 자연의 말이고 우주의 언어이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침묵의 의미를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닦지 않으면 때 묻기 때문이다.
마치 거울처럼,
닦아야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그 빛을 발핳 수 있다.
사람은 누구든 자기 자신 안에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 밑바닥에서는 고독한 존재이다.
그 고독과 신비로운 세계가 하나가 되도록
안으로 살피라.
무엇이든 많이 알려고 하지 말라.
책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
성인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종교적인 이론은 공허한 것이다.
진정한 앎이란 내가 직접 체험한 것,
이것만이 내 것이 될 수 있고 나를 형성한다.
.바깥 소리에 팔리다 보면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바깥의 지식과 정보에 의존하면
인간 그 자체가 시들어 간다.
오늘 우리들은 어디서나 과밀 속에서 과식하고 있다.
생활의 여백이 없다.
실로써 가득 채우려고만 하지,
허의 여유를 두려고 하지 않는다.
삶은 놀라움이요, 신비이다.
인생만이 삶이 아니라 새와 꽃들, 나무와 강물,
별과 바람, 흙과 돌, 이 모두가 삶이다.
우주 전체의 조화가 곧 삶이요, 생명의 신비이다.
삶은 참으로 기막히게 아름다운 것.
누가 이런 삶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어떤 제도가 이 생명의 신비를 억압할 수 있단 말인가.
하루해가 자기의 할 일을 다하고 넘어가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맑게 갠 날만이 아름다운 노을을 남기듯이
자기 몫의 삶을 다했을 때
그 자취는 선하고 곱게 비칠 것이다.
남은 날이라도 내 자신답게 살면서,
내 저녁 노을을 장엄하개 물들이고 싶다.
.빈 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만하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가득 찼을 때보다도 오히려 더 충만하다.
.인간의 혼을 울릴 수 있는 말이라면
무거운 침묵이 배경이 되어야 한다.
침묵은 모든 삼라만상의 기본적인 존재 양식이다.
나무든 짐승이든 사람이든 그 배경엔 늘 침묵이 있다.
침묵을 바탕으로 해서
거기서 움이 트고 잎과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다.
우리는 안에 있는 것을 늘 밖에서 찿으려고 한다.
침묵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에 고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늘 내 안에 들어 있다.
따라서 밖으로 쳐다보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안으로 들여다보는 데서 침묵을 캐낼 수가 있다.
침묵은 자기 정화의 지름길이다.
온갖 소음으로부터 우리 영혼을 지키려면,
침묵의 의미를 몸에 익혀야 한다.
.말이란 그렇게 살기위한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의 삶에 이어지지 않으면, 말이란, 공허하다.
자기 체험이 없는 말에 울림이 없듯이
그 어떤 가르침도
삶으로 구체화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깨어 있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그 순간을 살아야 한다.
좋은 말은 어디에 있는가?
그대가 서 있는 바로 지금 그 곳에
자신답게 살고 있다면
그 자리에 좋은 말이 살아 숨쉰다.
.여행길에 오르면 자기 영혼의 무게를 느낀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며 살아 왔는지,
자신의 속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여행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자기 정리의 엄숙한
도정이요, 생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하직하는 연습이기도 하다.
.홀로 여행자가 되면, 투명하고 순수해진다.
낯선 환경에 놓여 있을 때,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눈을 뜬다.
자기 모습이 뚜렷이 드러난다.
개체가 된다는 것은 곧 자유로워지는 것.
그리고 온전한 휴식을 누릴 수 있다.
.사심이 없는 무심한 마음은
그러한 마음끼리 서로 통한다.
.사람은 누구에겐가 의존하려는 습관이 있다.
불교는 부처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 자신답게 사는 길이다.
그러므로 불교란, 부처의 기르침일 뿐 아니라
나 자신이 부처가 되는 자기 실현의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의지할 것은
부처가 아니라 나 자신과 진리 뿐이다.
.생명은 늘 흐르는 강물처럼 새롭다.
그런데 틀에 갇히면, 늪에 갇히면 그것이 상하고 만다.
거듭거듭 둘레를 에워싼 제방을 무너뜨리고
늘 흐르는 쪽으로 살아야 한다.
.인생은 자기 몫의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모든 길과 소통하려면
그 어떤 길에도 매여 있지 말아야 한다.
.가치있는 삶이란, 욕망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의미를 채우는 삶이다.
내게 허락된 인생이, 내 삶의 잔고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는 삶이다.
.말은 침묵에서 나와야 한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말은 소음과 다를 게 없다.
인간은 침묵 속에서만 사물을 깊이 통찰할 수 있고
또한 자기 존재를 자각한다.
이때 비로소 자기 언어를 갖게 된다.
.투명한 사람끼리는 말이 없어도 즐겁다.
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않을 뿐
무수한 말이 침묵 속에서 오간다.
말수가 적은 사람들의 말은
무게를 가지고 우리 영혼 안에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오래오래 울린다.
.자기 자신답게 살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다.
.자기중심적인 개체의 삶에서
자타를 넘어선 전체의 삶으로 탈바꿈 되지 않고서는
거듭나기 어렵다.
.침묵과 고요와 몰입을 통해서 마음속에 뿌리내려 있는
가장 곱고 향기로운 연꽃이 피어난다.
.가슴은 존재의 핵심이고 중심이다.
가슴은 모든 것의 중심이다.
가슴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생명의 신비인 사랑도, 다정한 눈빛도 가슴에서 싹튼다.
가슴은 이렇듯 생명의 중심이다.
그 중심의 기능이 마비된것을 우린 죽음이라고 부른다.
.순간순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살아있는 사람이다.
낡은 것, 묵은 것으로부터,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거듭거듭 털고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침묵 속에서 사람은 거듭거듭 형성되어 간다.
침묵의 바다에 잠김으로써 자신의 실체를
응시할 수 있고, 시든 생명의 뜰을 소생시킬 수 있다.
.인간은 늘 근원적인 물음 앞에 마주서야 한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그런 물음과 대면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항상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켜쥐기 보다는 쓰다듬기를,
곧장 달려가기보다는 구불구불 돌아가기를 좋아한다.
문명은 직선이고, 자연은 곡선이다.
곡선에는 조화와 균형, 삶의 비밀이 담겨 있다.
이것을 익히는 것이 삶의 기술이다.
시간을 즐기는 사람은 영혼의 밭을 가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가는 것이지,
결코 오는 것이 아니다.
한번 흘려보내고 나면 다시 찿을 수 없다.
눈이 맑을 때, 실컷 배워 두라.
젊음이 머무는 동안 괴로워하며 탐구하라.
.깨어있는 영혼에는 세월이 스며들지 못한다.
세월이 비켜간다.
깨어있는 영혼은 순간순간 살아있기 때문이다.
.나의 취미는 끝없는, 끝없는 인내다.
July 08.2022 Donsoo Han, seami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