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1



프롤로그
. 사자가 말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주어진 환경과 개인의 경험이 다르다면, 우리는 같은 말을 한다 해도 서로를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 대화하고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건 언어가 아니다. 바로 공통 분모이다. 모두 함께 공유하는 공통 분모, 우리는 그것을 교양, 인문학이라고 부른다.
교양과 인문학은 단적으로 말해서, 넓고 얕은 지식을 의미한다.
. 지적 대화를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은 내가 발딛고 사는 세계에 대한 이해이다. 세계에 대해 이해하게 되면 그때서야 세계의 발을 딛고 있던 나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깊어진 나에 대한 이해는 한층 더 깊게 세계를 이해하는 토대가 된다. 나에게 보이지 않고 숨겨져 있던 세계에 대한 이해, 이것이 지적 대화의 본질이다.
역 사.
직선적 시간관과 원형적 시간관.
. 역사는 시간에서 출발한다.
시간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시간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다. 세상이 모든 것은 낡고 늙고 죽어가는 하나의 방향을 향해 변화해 간다.
시간이 실제하지 않는 상상의 산물이라고 말하기에는 세상은 시간의 영향을 너무도 크게 받는다.
. 시간에 대한 첫 번째 관점은 시간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하나의 방향으로 전진해 간다는 관점이다. 이러한 성질을 시간의 불가역적 성질이라고 한다. 시간이 하나의 방향으로만 전진한다는 관점을 직선적 시간관이라고 한다.
. 시간에 대한 두 번째 관점은 시간이 순환한다는 관점이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같은 패턴으로 시간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다가오는 내일은 경험하지 않은 내일이겠지만, 그렇다고 전혀 새로운 내일도 아닐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되돌아오길 반복한다는 관점을 원형적 시간관이라고 한다.
. 정리하면, 시간에 대한 커다란 두 입장이 있다. 시간이 직선적이라는 입장과 시간이 원형적이라는 입장, 물론 제3의 입장도 가능하다. 시간은 순환하는 동시에 앞으로 전진한다는 절충적인 입장이 그것이다. 용수철 모양처럼 말이다.
시간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은 실제로 서양과 동양의 시간관을 형성했다. 직선적 시간관은 서양의 문화와 종교의 밑바탕이 되었고, 원형적 시간관은 동양의 문화와 종교의 밑바탕이 되었다.
. 직선적 시간관은, 역사는 끝없이 발전해 간다는 진보적 역사관을 낳는다. 진보적 역사관에서의 역사는 직선적 시간관처럼 과거로의 회귀를 인정하지 않는다. 역사는 과거를지나,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며, 그 나아감은 어제보다 변화된 오늘이고, 오늘보다 변화된 내일이다.
어제는 삐삐였고, 오늘은 폴더폰이지만, 내일은 스마트폰이다. 기술과 문명은 절대 후퇴하지 않고 발전해 나간다. 스마트폰 다음에 삐삐가 다시 시장을 지배할 가능성은 없다. 인류의 점진적 발전과 진보에 대한 낙관이 진보적 역사관의 특징이며, 이는 서구 사상의 근간을 형성한다.
. 원형적 시간관은, 역사가 큰 틀에서 반복된다는 순환적 역사관을 낳는다. 순환적 역사관에서의 역사는 발전과 진보를 지속하지 않는다. 대신 발전과 퇴보를 반복한다. 이것이 동양적 역사관의 특징이다.
어제는 삐삐, 오늘은 핸드폰, 내일은 스마트폰인 건 인정한다. 그래서 오늘은 어제보다 더 행복해졌는가?
몸에 걸치고 손에 쥐고 다니는 것은 변했지만,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갈등하며 사는 삶이란 무수한 시간을 반복해 왔을뿐 그다지 발전한 것 같지는 않다.
. 인류의 역사에 대한 짧고 굵은 여정을 앞에 두고 시간에 대해 알아본 이유는, 시간에서 파생된 역사관의 두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진보적 역사관과 순환적 역사관 이 두 역사관 중 이제부터 우리가 사용할 틀은 진보적 역사관이다. 다시 말해서 앞으로 우리가 알아볼 역사는 발생한 사건들의 단순 나열을 넘어,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고 전개되는 흐름이 될 것이다.
생산수단 그리고 자본주의의 특성
. 인류의 역사를 다섯 개의 시대로 나눠서 살펴보려고 한다. 역사를 다섯 단계로 구분하는 익숙한 방식은 우리에게 공산주의 혁명가로 알려진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 5단계설에 기인한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다섯 단계로 구분하면서, 역사가 원시 공산사회, 고대 노예제사회, 중세 봉건제사회, 근대 자본주의를 지나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붕괴로 귀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가 내적 모순으로 붕괴된 이후에는 경제적 평등이 실현되는 공산주의 사회가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현 시점의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 예견은 빗나간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는 생각보다 유연해서 스스로의 문제점을 수정하고 변형하며, 위기를 극복 극복해 가는 것처럼 보인다.
. 원시부터 근대까지의 역사는 생산 수단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알아볼 것이다. 이 기간의 역사는 누가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지에 따라 변화한다.
생산 수단을 소유한 사람은 경제력을 가진 것이고, 경제력을 가진다는 것은 권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시 사회부터 근대 사회까지의 역사를 구분하는데 생산 수단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원시부터 근대까지를 누가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지에 따라 구분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원시부터 근대까지를 권력의 이동에 따라 구분하겠다는 의미이다.
. 원시부터 근대까지 역사를 움직이는 핵심 개념이 생산 수단이라면, 다음으로 근대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를 움직이는 핵심 개념은 자본주의의 특성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자본주의가 태생적으로 갖는 모습으로서 공급량이 언제나 수요량보다 많다는 특성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공급량은 과다하지만, 수요량은 공급량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것은 산업화를 통해 발전한 자본주의의 태생적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근대와 현대의 역사를 알기 위해 공급과 수요를 고려하는 것은, 근대와 현대가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근대와 현대의 모습은 자본주의의 특성에 의해 좌우된다.
원시 공산사회
. 원시 사회에서는 함께 수렵과 채집을 하고, 함께 나누는 공산 사회가 형성되었다.그래서 원시 사회는 원시 공산사회라 부른다. 공산은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관리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식물을 컨트롤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순간, 농업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더 이상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위험한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씨앗을 뿌리고 관리하며, 그 결실로 삶을 유지하면 되었다. 수렵채집으로 살던 때와는 생활 방식이 크게 변했다.
. 도구를 사용하면서부터, 원시부터 근대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며 가장 중요하게 다룰 핵심 개념이 등장한다. 바로 생산수단과 생산물이다.
생산 수단과 생산물을 구분해야 하는 것은 부와 재산을 결정하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 바로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있으면, 부는 계속해서 발생한다.
. 생산 수단을 소유하면 생산물을 소유하게 되고, 그 생산물을 이용해서 권력을 얻게 된다. 재미있는 일이다. 생산 수단과 생산물은 단순한 물질이다. 그런데 그런 물질이 비물질적인 사회적 관계로 서의 권력 관계를 발생시킨 것이다.
슬프게도 아름다웠던 원시 공산사회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고대 노예제 사회
. 생산 수단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원시시대의 돌 조각은 생산 수단이라 할 수 없다. 진정한 생산 수단은 토지와 영토 혹은 대농장이나 근대에 나타날 공장 같은 것들이다. 토지, 영토, 대농장, 공장이 돌 조각과 다른 점은 혼자서 소유할 수는 있지만, 혼자서 운영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즉 생산 수단은 노동을 대신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생산 수단은 소유자가 타인의 노동력을 이용하게 만들어 줌으로써 사회적 관계를 왜곡한다.
. 지배자는 신을 부른다. 신이 진짜로 응답을 하거나 말거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신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 문제는 지배자의 관심사가 아니다. 지배자 자신이 부를 수 있는 신이라는 언어만 있으면 된다. 왜냐하면 신은 지배자가 사회를 지배할 권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독단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자일수록 그의 신앙은 절실해 보인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지배자에 의해 신이 요청된다고 해서 혹은 지배자가 자신의 지배에 신을 이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신이 부재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적, 정치적으로 신의 문제를 고려했을 때, 신의 이름이 정치를 위해 사용되었을 혐의가 짙다는 것이다
. 고대 노예제 사회는 종교를 통해, 그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며 막을 내린다. 토지와 영토라는 생산 수단을 지배자가 독점하고, 그 독점의 정당성을 종교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고대 노예제 사회는 모든 문명의 시작에서 발견된다. 구체적으로 메소포타미아, 고대 이집트, 고대 인도 등 정치와 종교가 일치했던 대부분의 제정일치사회를 말한다.
중세 봉건제 사회
. 중세 봉건제 사회는 4세기부터 14세기 무렵까지 천년 정도의 시기이다.
. 세기를 나누는 기준은 잘 알려진 대로, 예수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의 탄생일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근대와 현대는 백번 양보해도 서양 중심의 역사이며,이 시기의 동양은 항상 지배받고, 교화되어야 하는 식민지였다. 세계의 주인공은 안타깝게도 서양임이 분명한 것 같다.
. 서구 사회의 문화와 역사를 관통하는 근원적 배경은 크게 두 가지다. 헬레니즘과 해브라이즘이 그것이다.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의 뿌리를 두고 있는 역사적 사조로서, 우리가 그리스, 로마 신화라고 하면 떠올리는 제우스나 아폴론 등의 다신의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다.
반면 해브라이즘은 야훼나 여호와, 하느님 등으로 불리는 유일신과 이스라엘 민족의 계약에 대한 역사적 흐름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교라고 하면 떠올리는 것들을 말한다. 쉽게 정리하면 서구는 두 가지 문화를 뿌리로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그리스도교.
.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박해를 받으며, 지하 무덤이면서 동굴인 카타콤에서 비밀스럽게 예배를 이어 가다가, 4세기, 분할되었던 로마를 통일한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박해의 대상이었던 그리스도교를 로마 국교 중 하나로 인정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발생한 그리스도교는 세계적 제국인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유럽 전체로 그 영향력을 뻗어 나갔다.
. 원시 공산 사회를지나 고대 노예제 사회에 이르러 토지와 영토라는 생산 수단은 왕에 의해 독점되었다. 이것은 물질적 측면에서 왕의 권력을 확보해 주었다. 그런데 왕은 여기에 더해 신을 요청함으로써, 정신적 측면의 권위까지 보장받게 되었다. 왕을 중심으로 하는 안정적인 절대 권력은 오랜 시간 동안 계급 사회가 유지되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중세 봉건 사회가 되면 사회 계급은 더 다양하고 복잡하게 분화되었다. 국왕과 노예 사이에 성직자, 영주, 귀족, 기사, 농로가 생겨났다.
. 중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계급은 영주다. 영주는 성의 주인으로서, 성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에 해당하는 장원을 소유하고 있었다. 장원은 쉽게 말하면, 영주의 사유지다. 직접적으로 영주의 영향권에 놓인 까닭에 장원에서 발생하는 모든 생산물은 영주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 여러 영주들이 한 명의 국왕 아래 있었고, 장원도 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봉토였지만, 영주가 생산 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한 이상 실질적인 권력은 영주에게 있었다.
영주들은 더 큰 권력을 위해 서로의 영토를 필요로 했다. 이러한 이해 충돌은 영주들간이 끊임없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분쟁을 조율해 줄 절대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기본적으로 중세의 모습은 고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명확하고, 사회는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왕이 더 이상 자기 스스로를 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세가 그리스도교의 문화권에 있기 때문이다. 국왕은 신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통치의 권한을 인정받은 존재였다. 그 권한은 성직자가 인정해 주었고, 그 대가로 국왕은 성직자의 지위와 교회의 재산을 보장해 주었다. 왕은 여전히 생산수단이라는 물질적 측면과 종교의 인정이라는 정신적 측면 모두에서 권력의 정당성을 획득했다. 이렇게 안정된 사회가 가능했기에, 중세는 천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 중세 후기가 되면, 견고했던 사회 분위기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첫 번째 원인은 상업의 발달에서 찾을 수 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부를 축적한 상인 계급이 등장했다. 이 새로운 계급은 고대와 중세의 유일한 생산 수단인 토지를 이용하지 않고도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들은 생산 수단을 소유한 지배층의 권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또 스스로도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했다.
두 번째 원인은 공장의 탄생에서 찾을 수 있다. 18세기가 되면서 제임스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했고, 이 장치는 물을 끓여서 발생한 수증기로 터빈을 움직여 기계를 작동시켰다. 이러한 증기기관이 당시에 발전하고 있던, 분업 시스템과 만나게 되었다. 분업은 한 명이 하던 복잡한 일을 여럿이 분담함으로써, 일의 효율을 높이는 작업 방식이다. 작업이 분담되니 일은 단순해지고 빨라졌다. 효율적인 분업에 증기 기관이 더해지자 폭발적인 생산력을 일으켰다. 공장이 탄생한 것이다. 즉 공장은 새로운 생산 수단이다. 이렇게 새로운 수단을 소유한 계급을 사람들은 부르주아라고 불렀다. 장원을 소유하고 있는 구권력과 공장을 소유하고 있는 신권력 이 생성되었다. 구권력은 신권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 산업과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 계급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정치에 참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구권력이 이를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며, 동시에 구권력의 지배를 정당화 해주는 신과 같은 이론적 토대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권력은 자신들의 정치, 사회 참여를 정당화해 줄, 신을 대신할 이론적 토대가 필요해졌다.
. 현실에서의 신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현실 세계를 설명해 주는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사후세계를 주관하는 역할이다.
. 부르주아가 왕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왕의 권위를 정당화 해주는 신부터 극복해야 했다. 다시 말해, 신의 역할을 대신해 줄 만한 무엇인가를 찾아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르주아는 인간의 이성으로 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대체했다. 이성은 신의 독점했던 두 가지 역할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었다.
우선 이성은 현실적 물음에 답을 준다. 우리는 진화의 과정을 거쳐 여기 왔으며, 다른 생물종들과 다르지 않은 생물학적인 존재이다. 우리가 땅에 발을 딛고 사는 것은 중력이라는 힘 때문이고, 힘은 질량과 가속도의 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 중력은 만유인력의 다른 표현인데, 만유인력은 우주 전체의 작동 원리이다. 이렇게 이성은 신을 배제하고도 현실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었다. 다음으로 이성은 인간이 사후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사후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의식과 정신에 대해 말할 수는 있어도, 영혼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 사후세계를 말하는 것은, 경험적 근거가 없는 비과학적인 태도이고, 종교의 환상에 젖어 있는 망상일 뿐이다. 영혼도 사후도 없다. 죽음은 신체 기능의 정지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 부르주아는 왕을 정당화하는 신을 대신해 자신들을 정당화해 주는 이성을 성공적으로 세계에 입성시켰다. 같은 맥락에서 부르주아는 자신들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시했다. 사회 계약설이라고 불리게 된이 개념은, 사회가 시민의 계약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이것은 신의 냄새가 남아 있는 왕권 신수서를 대체하는, 신 없이 사회를 설명하는 방법이었다. 이제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주체는 신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되었다.
. 문명이 탄생한 이래, 인류는 왕이라는 존재의 지배를 받아 왔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이 문제시 되지 않았다. 평등이라는 개념을 갖지 못한 채 인류는 존재해 왔다. 그러다가 그것이 문제라는 것, 그러므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행동으로 표출된 사건이 프랑스 대혁명(1789)이다. 이를 계기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지배를 받지 않는 자유인이 대거 등장했다. 왕이 있는 세계에서 자유인이란 왕 혼자일 뿐이다. 하지만 왕을 몰아낸 프랑스 대혁명은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부르주아는 더 이상 지배받지 않는 자유인이 되었다. 그리고 중세도 끝났다.
근대 자본주의
. 근데 자본주의 시대는 대략 18세기부터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 200년 정도의 기간이다.
중세의 생산 수단인 장원은 근대에 와서 공장과 자본으로 대체되었다. 생산 수단이 변화함에 따라, 이를 소유한 지배 권력도 왕과 영주에서 부르주아로 이동했다.
사회 계급 구조도 새롭게 재편되었다. 사회 계급은 둘로 나뉘었다. 생산 수단을 소유한 사람들인 부르주아와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인 프롤레타리아가 그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부르주아는 자본가계급,
시민계급, 유산계급으로 불린다. 그리고 이와는 대비되는 프로레타리아는 노동자 계급, 무산 계급으로 불린다.
.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으로 생산물을 얻고, 그 생산물을 판매해서 얻은 이익을 일단 모두 소유한 후에, 그 중에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만큼의 일정 부분을 떼어 프롤레타리아에게 지급한다. 실제로 노동하고 생산물을 만들어 낸 건 프롤레타리아였지만, 부의 축적은 생산 수단을 소유한 부르주아 의 몫이 되는 것이다. 이 문제가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본질이다.
기업 소유자는 고용에 따른 비용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이를 통해 기업의 이윤을 최대화하는 것에 목표를 둔다. 반면 기업에 고용된 사람은 자신의 노력과 성과에 비해, 언제나 급여가 적다고 느끼고, 이를 늘리기 위해 개인적으로 애쓰거나, 집단적으로 대응한다. 근대 초기나 오늘날이나 사회 갈등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중간 정리
. 인류의 역사를 따라가는 여행은, 원시 공산사회에서 시작해 고대 노예제 사회를 거쳐 중세 봉건제 사회를 지나왔다. 가장 중요한 핵심 개념은 생산 수단이었다. 시대가 고대, 중세, 근대를 거치면서 생산 수단은 토지, 장원, 공장으로 변화했고, 생산 수단을 소유한 계급은 왕, 영주, 부르주아로 변화했다. 역사는 생산 수단에 의한 계급 갈등이라는 단순한 구조에 따라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근,현대의 기간을 이해하는 데는 생산 수단만으로는 부족하다. 다른 핵심 개념이 필요하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특성이다. 근대와 현대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왔다. 그래서 이 체제의 특성은 근대와 현대 사회에 반영되고, 그 모습을 변형시켰다.
근대 자본주의의 전개
. 자본주의는 산업혁명에 의해 시작되었다. 바꿔 말하면 산업혁명이 필연적으로 자본주의를 발생시켰다. 산업혁명은 특별한게 아니다. 단적으로 공장의 탄생을 말한다. 공장은 기계와 분업을 통해 대량으로 생산물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쏟아져 나온 막대한 양의 생산물이 화폐 경제를 만나면서, 필연적으로 자본주의가 탄생했다.
자본주의는 공장을 기반으로 하기에, 공장의 특징이 자본주의의 특징으로 이어졌다. 공장의 특징은 대량 생산이고, 이에 따른 자본주의의 특징은 공급 과잉이다.
. 자본주의의 특성은 공급이 수요보다 많은 상태다. 다른 말로는 공급과잉, 초과 공급이라고도 말한다. 공급과잉의 상태는 무엇인가?
비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가장 일반적이고 본질적인 상태다. 이제부터 공급 과잉을 핵심 개념으로 근대와 현대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 공급 과잉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은, 논리적으로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공급을 줄이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수요를 늘리는 방법이다.
공급을 줄인다는 것은, 공장 가동을 멈추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공장을 멈춘다는 것은 고정 비용의 부담을 전제하는데, 고정 비용만 계속 지불하느니 차라리 공장을 가동하는게 더 이익이다.
이제 해결 방안은 하나뿐이다. 수요를 늘리는 방법이다. 수요를 확대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시장 개척과 가격 인하라는 두 가지 해결 방안이 그나마 가장 궁극적 방안이다.
제국주의 시대
. 산업화를 통해 자본주의가 된 국가들은 자본주의의 특성인 공급과잉 문제에 필연적으로 봉착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수요를 늘리기 위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만 했다.
시장을 개척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식민지를 만드는 것이다. 식민지를 만들어 원료를 공급받고, 가공품을 판매하면 된다. 이것이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된 유럽이 필연적으로 거칠 역사의 방향이었다. 실제로 산업화된 유럽 국가들은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세계로 뻗어 나갔다. 영국은 인도로 갔고, 스페인은 남미로 갔으며, 프랑스는 아프리카로 갔다. 그곳에 식민지를 만들어, 자국에서 만든 생산물을 공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판매하고 큰 이익을 얻었다.
근대 유럽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확보함으로써 공급 과잉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산업화된 국가들이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던 시대를 제국주의 시대라고 한다.
. 영국은 18세기부터 인도를 식민지화한 후에 자국의 면적물을 인도해 판매하고, 그 대가로 아편을 받았다. 그리고 받은 아편을 다시 중국에 판매하고, 그 대가로 홍차와 막대한 부를 얻었다. 반대로 인도 경제는 영국의 면직물 산업에 종속되면서, 많은 자원과 부를 영국에 빼앗겼다. 면적물로 인해 국가 전체가 영국에 종속된 것이다. 그래서 인도의 민족 해방을 이끌었던 간디는 영국산 면직물의 수입을 막기 위해, 스스로 옷을 제작해서 입자는 운동을 펼쳤다. 우리가 간디를 생각할 때, 물레를 감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레는 영국산 면적물에 대한 거부이자, 궁극적으로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상징했다.
. 독일은 빠르게 산업화하는 유럽에 속했으면서도, 산업화가 늦어지면서 뒤늦게야 제국주의의 경쟁에 끼어들었다. 독일의 산업화가 늦어진 것은 중세 봉건 체재가 오래지속되면서 계속된 내전으로 산업화를 추진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통일된 독일은 산업화를 먼저 거친 영국과 프랑스 등 선진국들과는 다르게, 면직물 같은 전통적 공업보다는 국가 주도의 중화학공업을 발전시키며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다.
독일 역시 산업화에 따라 자본주의가 정착했고, 자본주의의 특성인 공급과잉 문제에 봉착했다. 다른 산업화된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독일도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시장을 확보해야만 했다. 즉 식민지 국가를 건설해야만 했다. 독일은 필연적으로 식민지를 찾아 떠났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더 이상 차지할 만한 식민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앞서 산업화를 이룩한 열강들이 식민지를 모두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에는 위기였다. 산업화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장이 필수지만, 새롭게 개척할 수 있는 시장이 없으니 말이다.
.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있는 가운데 기회가 찾아왔다. 1914년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보스니아의 사라예보 지역에 갔다가, 독립을 원하는 세르비아계 청년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러시아 지역에서 민족 문제로 암살당한 것이다. 독일한테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사건을 빌미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1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
. 1차 세계 대전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약 4년 동안 지속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궁극적인 원인은 자본주의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공급 과잉이라는 자본주의의 태생적 관계를 극복하고, 산업화를 유지하기 위해 독일이 선택할 수 있는 해결책은 전쟁 밖에 없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그리고 이탈리아가 삼국 동맹을 형성했고, 영국과 프랑스와 러시아가 3국 협상 결을 결성하여 대립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에 협력한 이유는 단순했다. 국가 주도의 중화학 공업을 중심으로 급속히 성장하는 독일이 자신들의 식민지를 위협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독일을 저지해야만 했다
. 전쟁은 막대한 수요를 창출했고 이로 인해 공급 과잉이라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일시적으로 회수해 주었다. 실제로 다수의 민간인은 고통스러울 수 있으나 전쟁은 일부 부르주아 혹은 일부 국가들에 막대한 부를 창출해 준다. 자본주의는 전쟁과 가까울 수밖에 없다. 전쟁은 자본주의 국가들을 유혹한다. 사실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유지해 주는 핵심 요소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유행이다. 전쟁과 유행은 자본주의라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라 할 수 있다. 전쟁이 공급 과잉의 문제를 단번에 해소하듯, 유행은 필요를 뛰어넘는 막대한 소비를 창출해서 공급과잉 문제를 해소한다. 전쟁과 유행이 없이 자본주의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세계 경제대공항
. 전쟁 후 세계 경제는 호황을 맞이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예전에 경험했던 문제가 다시 발생하기 시작했다. 과잉 생산이 일어나고, 시장은 포화 상태가 되고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요를 늘리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품의 가격을 낮추는 것이다.
이 중에 우리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방법이 역사를 제국주의로 이끌어 제1차 세계대전으로 귀결되었던 모습을 확인했다. 그런데 더 이상이 시장 개척은 불가능해 보인다. 새로운 식민지는 지구상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두 번째 방법은 가격을 낮추는 방법이다. 가격을 낮추기 위한 노동자 해고 사태가 일어났다. 문제는 노동자는 노동자인 동시에 소비자라는 점이었다. 해고당한 노동자는 소비 능력을 상실한 소비자와 동일하다. 다시 말해서 사회 전체적으로 실업자가 늘어나면서 소비도 줄어들 수밖에 없게 된다. 이때 소비가 줄어든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수요량보다 공급량이 더 많아짐을 의미하고, 공급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다시 모든 산업에서 가격인하 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또 가격을 인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를 해고해야만 하고, 해고된 노동자가 다시 소비 능력을 상실한 소비자가 되어, 수요를 창출하지 창출하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지기 되는 것이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실업자는 늘어 가고, 문을 닫는 공장과 기업이 속출했다. 이 문제가 폭발한 사건이있었다. 뉴욕 증시가 대폭락하면서 세계 경제 전체를 무너뜨린 1929년의 세계 경제 대공황이다.
. 전쟁으로 수요가 폭발하면서 이루어진 경제 성장은 특히 미국의 유례 없는 호황을 가져왔다. 사람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경제에 낙관했다. 빠르게 늘어나는 자산에 들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기업의 주식을 사기 위해 빚을내어 투자했다. 하지만 1929년 10월 29일, 뉴욕 증시는 하루 아침에 30% 폭락했다. 그리고 폭락은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져 1932년에는 90% 가까이 폭락했다. 국내 총생산은 반토막이 났고, 실업률은 25%에 달했다. 당시 세계 총 생산의 절반 가까이를 담당하던 미국 시장의 침체는 빠르게 세계 시장의 침체로 이어졌다.
. 대공항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은 뉴딜 정책을 시행했다. 이것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가 시행한 경제 정책으로 국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자유시장의 문제점을 해소하려는 의지를 담은 정책이었다. 즉 공급 과잉이라는 자본주의의 내적 문제점을 정부가 인위적으로 개입해서 조절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 해결 방식을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수정한다는 의미에서 수정 자본주의 혹은 앞선 초기 자본주의와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후기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경기 침체를 해결하기 위해, 도로, 항만, 철도, 댐 건설 등의 공공 사업을 추진했다.
. 러시아는 자본주의를 수정한 미국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공급과잉이라는 문제점을 내포한 자본주의를 폐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마르크스 경제학에 따르면 공황은 우연히 아니라 필연이다. 태생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내버려 두어도 어차피 자연스럽게 붕괴할 것이다. 다만 러시아는 붕괴를 앞당기기로 했다. 그래서 혁명이라는 인위적인 과정을 거쳐 자본주의를 폐기하고, 공산주의 경제 체제를 선택했다. 혁명 이후 러시아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으로 명칭을 전환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공산주의로 돌아선 것은 1929년 대공황 이후는 아니다. 러시아 공산주의는 1917년 혁명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1922년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되었다. 그러니까 러시아는 대공황 이전에 자본주의를 폐기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들이 대공황으로 경기침체를 경험하던 시기에, 반대로 러시아는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안정적으로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고 있는 중에, 설상가상으로 대공황까지 겹치자 국가적 파산에 직면했다. 물가는 치솟고, 화폐는 휴지 조각이 되었다. 수레에 마르크화를 가득 싣고 가도 빵을 사기에 부족할 정도였다. 국민의 고통과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때 모든 독일인을 구원해 줄 영웅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히틀러다. 히틀러는 독일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전쟁 배상금 때문임을 밝히고, 자신이 전쟁 배상금을 물지 않게 하겠다며 독일인을 선동했다. 그리고 위대한 독일 민족이 이렇게 초라해진 원인에 대해 철학적 견해도 제시했는데, 그것은 독일 민족이 살고 있는 땅이 너무도 좁다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독일의 영토가 오염되면서 위대한 독일 민족의 영혼이 고통을 받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오염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한 것이 독일의 영토에 살고 있는 저열한 유대인이었다. 독일 민족의 위대한 부활을 위해, 영토를 순결하게 청소할 필요가 있었다. 이로써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가 시작 되었다.
. 예수를 죽인 직접적인 피의자는 누구인가? 바로 유대 민족이다. 문제는, 이후 서구 유럽 사회가 그리스도교 문화권이 되었다는데 있다.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의 정치 사회적 지위는 어떠했겠는가? 유대인은 예수 살해라는 전 우주적 범죄를 저지른 민족으로 취급받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독립 국가를 갖지 못했고, 여러 국가에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다른 민족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나라가 없으니 농사를 지을 땅도 없었다. 유대인은 어쩔 수 없이 중세를 거치는 동안 가장 천대 받던 상업과 대부업에 종사했다. 그런데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근대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상업과 대부업은 무역과 금융업이 되었고, 유대인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준 것이다. 지금까지도 세계적인 금융산업은 유대 자본에 의해 움직인다.
.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죄악으로 가득한 민족이며, 독일이 전쟁 배상금으로 허덕일 때도 금융산업을 바탕으로 부유하게 살아가는 얄미운 놈들이다. 게다가 외모 면에서도 유대인은 개인적 차이는 있지만, 미묘하게 동양적이다. 독일인은 전 우주적 범죄를 저질렀던 유대 민족을 처단하고, 성스러운 독일을 재건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따라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인종 청소를 감행했다. 여기까지는 명분이고 실제로 유대인을 학살해야 했던 실질적 원인을 생각해 보자.
.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며, 전쟁 배상금을 물지 않게 하겠다고 민중을 선동했다. 그 결과 독일 민족 사회주의 정당인 나치당이 민중의 열렬한 지지로 집권당이 되었다. 일단 집권을 하긴 했는데, 히틀러는 고민에 빠졌다. 민족에게 전쟁 배상금을 물지 않게 하겠다고 장담해 놓았는데, 방법이 없었다. 그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다시 전쟁을 해서 이기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문제가 있었다. 전쟁을 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데, 경제공황과 배당금 때문에 독일의 재정은 충분하지 못했다. 유대인은 부유하다. 그들의 재산을 몰수해서 전쟁을 하면 되었다. 하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재산을 몰수하면, 여론이 좋지 않을 것이고, 독일군도 쉽게 수긍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철학적 정당화 과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민족성과 영토를 연결한 히틀러의 생각이 탄생한다. 그리고 이 생각은 독일 민족에게 먹혀 들었다. 독일인은 열광했다.
. 땅과 민족을 하나로 연결하는 세계관은 민족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물질화하게 만들고, 국경과 토지에 대한 집착으로 발전한다. 국가 간의 영토 분쟁은 신성불가침의 민족적 정신에 대한 침략이 된다. 혹시나 합리적인 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하면, 그는 변절자와 매국노가 된다. 영토 소유에 대한 배타적이고 감정적인 외침이 간증이 되고, 찬양의 대상이 되는 사회 그런 사회는 결과적으로는 경제적 이익을 얻을지는 모르지만, 세계 대전 당시 독일 민족의 광기와 부도덕성보다 나을 것이 없다.
. 우리는 보통 역사를 영웅사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영웅사관이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능력을 초월하는 천재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특정 인물이 역사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이와 반대되는 역사관이 민중사관이다. 민중사관은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를 민중으로 본다. 우리가 세계대전을 영웅사관의 시각으로 본다면 세계대전을 일으킨 사람은 히틀러가 된다. 반면 세계대전을 민중사관의 시각으로 본다면 세계대전을 일으킨 원인은 경기침체의 고통을 극복하고자 했던 독일 민족의 의지가 된다.
영웅사관과 민중사관은 어느 것은 옳고 다른 것은 그르다기보다는 역사 해석을 다채롭게 해주는 두 가지 시각이다.
지대넓얕 1-2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