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5



미디어의 말
. 개인은 언제나 거대한 세계와 만난다. 사실 더 근본적으로는 세계가 존재하는지를 인식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세계에 놓여 있다. 그래서 인간은 너무도 압도적인 세계의 위엄에 본능적으로 세계 자체를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갖게 된다. 세계가 기본적으로 타당하다는 다시 말해 세계가 안정적이라는 세계관을 갖게 되는 것이다.
. 우리는 암묵적으로 미디어가 객관적인 진실을 말해 준다고 의심 없이 신뢰한다. 미디어에 높은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어쩌면 타당할 수 있다. 무수히 많은 사람에게 노출되는 미디어라면, 다수의 감시와 비판 속에서 그나마 가장 진실되고 객관적인 내용을 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은 한편으로 불확실한 사회에서 그나마 믿을 만한 판단 기준을 제시해 준다는 면에서 긍정적일 수 있다. 다만 객관적이라 믿었던 미디어가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다면 그때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 화용론은, 그 말의 내용이 아니라 그 말의 주변 상황을 생각해 보는 방법을 말한다. 단순화 해보면 언어나 말에 대한 탐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의미론이고, 다른 하나가 화용론이다. 의미론은 내가 내뱉은 말 자체의 내용과 의미를 탐구한다. 반면 화용론은 내가 내뱉은 말이 왜 하필 그 시간, 그 공간, 그 주체와 대상 가운데서 말해졌는가를 파악하려 한다.
화용론은 말의 내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 말이 사용되는 외적인 시간, 공간, 주체 대상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다
. 미디어는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미디어가 틀린 정보를 보도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미디어의 보도도 의미론과 화영론의 측면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언론과 방송이 의미론의 측면에서 거짓을 말하는 경우는 없다. 물론 가끔 잘못된 정보를 보도해서 정정 기사를 낼 때도 있지만, 그건 일회성으로 그침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미디어가 화영론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디어는 미세한 편집과 보도 순서의 배열을 고려하는 등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방법을 활용해서 직접 말하지는 않아도 맥락을 통해 주관적 사고와 이념을 전달한다.
. 시장 경제의 민주주의 체제에서의 권력은 기업에 있다. 그리고 미디어는 기업의 입장을 충실하게 대변한다. 미디어는 광고비를 대는 기업의 눈치를 보고, 특히 대규모 재벌 기업과 관련된 내용은 자체적으로 검열한다.
20세기 가장 중요한 언어 철학자인 동시에 사회 정치적 실천가인 노암 촘스키는 신문과 방송이 광고주인 사기업의 이익을 대변해 주고, 사기업들은 광고로 언론의 이익을 보장함으로써, 잘못된 이익의 먹이 사슬이 형성됐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미디어의 한계를 직접적으로 지적했다. 그렇다면 미디어가 기업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은, 시장의 자유, 세금 인하, 규제 철폐, 구체적으로는 경제 체제로서의 신자유주의 정치 이념으로서의 보수주의다.
. 단적으로 말해서 당신의 삶이 현재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다면, 재벌 기업의 특정 제품이 세계 점유율 1위가 되고, 스포츠 스타가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은 당신에게 절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최종 정리
. 우리 사회에는 두 주체로서 개인과 집단이 있고, 이들은 다양한 측면에서 갈등의 상황에 놓인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하는 개인주의,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주의는 각각 이기주의와 전체주의로 극단화될 수 있다. 근현대의 전체주의 폭력을 경험한 현대인은 개인을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연권을 찾았다. 자연권은 생명, 재산, 자유의 절대적 보호를 근간으로 한다.
그런데 자연권은 이론적 측면에서 볼 때, 민주주의와 충돌할 가능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민주제의 다수결 방식을 통해 다수의 노동자가 소수의 자본가에게 막대한 세금을 부과해, 자본가의 재산권을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보면 민주주의 사회는 전체주의나 진보적인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현실적 측면에서는 반대의 상황이 발생한다. 노동자가 절대 다수를 점유하고, 빈부격차의 문제가 실질적이고, 가시적인 상황에 이르러서도, 기업과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 집권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우리는 미디어가 기업의 광고로 유지된다는 태생적인 특성 때문에 미디어는 필연적으로 기업과 자본과의 이익을 대변하는 한계를 가진다. 그리고 강력한 영향력과 편집의 기교를 통해 미디어는 사회를 점차 보수화한다. 정치 집권에 대한 이론적 측면과 현실적 측면 간의 괴리를 설명해 주는 주요 연결 고리가 미디어의 특성에 있는 것이다.
대중은 정교하고 매끄러운 미디어의 영향 아래 놓이며, 자신의 신념과 사고의 번거로움을 포기하고, 모든 평가와 판단을 미디어에 양도한다. 이렇게 미디어에 자신의 판단을 양도하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로워지고,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세계 밖의 진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고, 인생의 깊이를 얻지 못할 것이며, 타인들과의 지적 대화 속에서 빛날 수는 없을 것이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삶만큼 주체적인 삶은 없다.
윤리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는 윤리적 상황
윤리적 판단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윤리적 판단에 앞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에 대한 시점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문제의 당사자일 때와 제3자의 입장일 때, 종종 다른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며,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가장 관대하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윤리 담론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위치를 사건과 분리해야 한다. 즉 윤리에 대한 모든 논의에서 해당 사건에 포함되지 않는 제3자의 시점을 전제로 해야 한다.
윤리의 정의
. 윤리적 판단은 실제 세계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윤리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비슷한 말로는 도덕이 있는데, 일상생활에서는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같은 말처럼 쓴다. 다만 어감에서 오는 차이가 있다. 도덕은 실천적인 느낌이 강하고, 윤리는 이론적인 느낌이 강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합의하고 암묵적으로 준수하는 규범이나 규칙을 도덕이라 하고, 그런 규범과 규칙이 정당한지를 의심하고 검토하는 것이 윤리라고 할 수 있겠다.
. 윤리가 무엇인지 조금 더 체계적으로 설명하면, 그것은 당위적 명제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 정도가 된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말을 할 때, 언제나 문장으로 표현하는데 문장으로 말을 한다는 것은, 주어를 말하고 이어서 술어를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의 모든 언어가 주어와 술어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은 이 우주 자체가 존재자와 그 상태로 되어 있기 때문일 수 있겠다. 어쨌거나 이 주어와 술어의 합, 다시 말해 존재자와 그 존재자의 상태를 언어로 묘사한 것을 명제라고 부른다. 문장과 비슷한 말이다. 문장은 영어, 불어, 한국어 등으로 실제로 표현된 것이고, 명제는 그 표현이 의미하는 것을 말한다.
. 무한하게 많은 명제는 두 종류로 구분된다. 어떤 명제들은 술어가 ~이다.라고 끝난다. 반면 다른 명제들은 술어가 ~이어야 한다.라고 끝난다.
술어의 상태에 따라 명제가 둘로 나뉘는 것이다. 앞의 문장을 사실 명제라고 하고, 뒤의 문장을 당위 명제라고 한다. 예를 들어 사과는 맛있다.라는 문장은 사실 명제다. 다음으로 사과는 맛있어야 한다.라는 문장은 당위명제이다.
. 학문마다 탐구하는 명제가 다르다. 사실 명제를 탐구하는 학문은 과학이고, 당위 명제를 탐구하는 학문은 윤리학이다. 사실 명제는 항상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반면 당위 명제는 그렇지 않다. 즉 당위 명제는 참과 거짓의 판단을 넘어서 있고, 이에 따라 윤리적 명제 역시 참과 거짓을 말할 수 없다. 단적으로 사실 명제와 당위 명제는 성격이 너무나 달라서, 이 둘은 각각의 세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명제에서 당위 명제가 도출되거나, 반대로 당위 명제에서 사실 명제가 도출되는 일은 없다.
당위 명제는 사실 명제를 통해 증명될 수 없다. 당위 명제는 사실 명제와 무관하게 그 문장 자체의 내용만을 토대로 판단하고 평가해야 한다. 즉 윤리적 판단은 실제 세계가 어떠한지와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의무론과 목적론
. 윤리라는 전체 분야를 딱 반으로 나눈다면, 반은 의무론, 나머지 반은 목적론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의무론과 목적론은 윤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두 가지 답변이다.
의무론은 도덕적 법칙이나 의무를 준수하는 행위가 윤리라고 보고, 목적론은 다수의 이익을 창출하는 행위가 윤리라고 보는 것이다. 쉬운 예로 의무론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종교인이다. 반면 목적론적 윤리관의 모습은 안중근 의사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람을 죽이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야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족의 해방과 독립이라는 좋은 결과를 위해 총을 쏜 것이다.
. 의무론과 목적론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성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르는 시간의 선을 생각해 보자. 당신은 지금 현재에서 있다. 특정 행위를 하려 할 때, 당신은 과거와 미래를 고려하게 된다. 우선 과거에서부터 주어져 있는 의무를 고려해서 행동할 수 있다. 이것은 의무론적 태도가 된다. 다음으로 미래의 발생할 결과를 고려해서 행동할 수도 있다. 이것은 목적론적 태도가 된다. 결과를 고려한다는 점에서 목적론을 결과주의라고 부르고,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무론을 비결과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 현대의 개인주의적이고, 경쟁적인 신자유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목적론자들이다. 우리는 어떤 행위를 할 때, 그것이 나와 집단의 미래에 이익이 될 것인가를 고려해서 행동한다. 어떤 삶이 더 좋은 삶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판단의 몫은 당신에게 있다.
의무론과 정원 명법
. 의무론을 대표하는 철학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칸트다. 칸트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가 뭘 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칸트는 학문에서 중간 보스 정도는 되는 사람이다. 문학, 철학, 예술 등 인문학의 어떤 분과든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가면 결국 그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어렵게 중간 보스를 물리치고 올라가다 보면 마지막에 끝판왕 삼형제가 기다리고 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들이다.
칸트는 18세기 사람으로 지금으로부터 대략 250년 전에 독일에서 활동했다. 세 편의 책으로 유명해졌는데, 순수 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이 그것이다. 이 비판 시리즈에서의 비판은 무엇인가를 비난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계를 밝힌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어디까지를 할 수 있는지, 그 범위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비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비판과 비난을 비교해 보자. 비판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한계를 규정해 주는 것이다.
실제로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은 순수 이성의 한계를 밝힌다는 것이고, 실천 이성 비판은 실천 이성의 한계를 밝힌다는 것이다. 판단력 비판도 마찬가지다.
여기서의 순수 이성은 인간의 감각, 지각, 지성 능력인 인식능력을 말함으로 이를 비판한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 능력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실천 이성은 인간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 능력을 말하는데 실천 이성 비판은 윤리가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준다. 판단력 비판은 아름다움에 대한 것으로 미학을 제시한다. 우리가 지금 다루려고 하는 의무론적 윤리설은 칸트의 실천 이성 비판의 핵심적 논지가 된다.
. 칸트는 도덕 법칙들이 무너져 가는 시대상을 마주하며 상대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철학 담론 속에서 절대적 도덕 법칙을 찾아 세우려고 노력했다. 절대적인 도덕 법칙을 찾는 건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상황에 따라 모든 일에는 항상 예외가 있고, 사람마다 생각하는 도덕 판단의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절대적 도덕 법칙의 존재가 의심받는 상황 속에서 칸트가 제시한 것은 정원명법이었다. 이것은 누구나 반드시 따라야 하는 도덕 법칙이 무엇인지를 이성적으로 알려 주는 방법으로서 칸트가 제안했다.
실제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내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를 이 말을 쉽게 바꿔 보면, 내가 개인적으로 하려는 일이 동시에 모든 사람이 해도 괜찮은 일인지 생각하고 행동하라 정도가 되겠다.
. 정언명법이란 절대적이고 보편적이어서 누구나 따라야만 하는 도덕 법칙을 찾아내는 계산 기계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정원명법 기계에 내가 하려는 행위 X를 넣어 본다. 그러면 계산을 거쳐서 이 행위 X가 보편적 도덕 법칙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구별해 준다. 이 계산 기계가 작동하는 방식은 단순하다. 내가 하려는 특정 행위 X를 사회 구성원 모두가 동시에 한다고 가정해 보는 것이다. 만약 그래도 사회가 붕괴하지 않는다면 그 행위 X는 보편적 도덕성을 띤다고 할 수 있다.
목적론과 공리주의
. 목적론적 윤리설을 대표하는 입장은 공리주의다. 공리주의는 19세기 무렵에 영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윤리적 견해로 벤담과 밀이 대표적이다. 공리주의는 단적으로 말해, 윤리의 궁극적인 목표로 개인과 사회의 이익에 초점을 맞춘 사상이다. 여기서의 이익은 쾌락이나 행복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공리주의의 모토는 너무도 유명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이 말은 공리주의의 핵심 논점을 명쾌하게 보여 준다. 한마디로 윤리적인 것이란, 가장 많은 사람에게 가장 행복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공리주의의 장점은 단순하고 명쾌하다는데 있다. 아무리 복잡한 현실의 문제라도 공리주의는 쉽게 해결한다. 단적으로 결과가 최대의 이익을 산출하면 끝인 것이다.
. 벤담은 1789년에 출간한 도덕과 입법의 원리 소설에서 도덕과 법이 따라야 하는 원리로 공리의 원칙을 제시했다. 여기서 벤담은 모든 행위의 시비는 그것이 사람의 행복을 증진하는지의 여부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벤담의 공리주의를 양적 공리주의라고 해서 밀의 질적 공리주의와 구분하기도 한다. 벤담과 밀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동의를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로서의 행복에 대한 관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벤담은 행복을 양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밀은 행복의 질적인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벤담식의 공리주의는 단순하고 명쾌하다는 큰 이점을 갖는 반면 윤리에 대한 설명이라기 보다는 경제적 이익에 대한 설명인 듯 해서 윤리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다. 이렇게 단순 무식한 공리주의를 세련되게 만들어 준 인물이 19세기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존 스튜어트 밀이다. 밀은 질적 공리주의를 통해 쾌락과 행복에도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밝혔다. 인간은 감각에 의한 말초적 쾌락뿐만 아니라 고결하고 구상한 쾌락도 추구한다. 따라서 쾌락과 행복은 단순 합산으로 측정할 것이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
밀은 자신의 저서 공리주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다.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 만약 바보나 돼지가 다른 견해를 가진다면, 그것은 오직 자기 입장에서만 문제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상대들은 문제의 양쪽 입장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
밀은 쾌락과 행복의 질적인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개인의 자유, 평등 등 인간의 최소한의 권리와 가치들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하이에크와 롤스
. 하이에크는 20세기 영국에서 활동한 경제학자로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아버지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당시 미국과 영국에서 채택되었던 케인스 이론에 맞서 그는 정부주도의 계획 경제를 강력히 비판하고 자유시장을 옹호했다.
공정한 기회와 절차가 보장되어 있다면, 결과가 아무리 큰 격차를 발생시켰다 해도 그 성과를 보장해 주는 사회가 윤리적이고 정의로운 사회인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결과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절차나 과정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의무론적 윤리설에 가깝다. 이에 따르면 사회에서 발생한 빈부 격차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게임에 대한 정당한 대가다. 그렇기에 윤리적인 사회를 만들겠다며 세금을 늘리는 행위는 어불성설이 된다. 진정으로 윤리적이고 정의로운 사이를 만들기를 희망한다면,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절차가 준수되고 있는지, 위법 행위는 없는지를 국가가 감시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 롤스는 하이에크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활동한 철학자로 대표 저서로 정의론이 있다. 롤스는 세금을 높일 것인지, 낮출 것인지, 재분배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합리적 판단을 위해 하나의 사유 실험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를 원초적 입장이라고 이름 붙였다.
원초적 입장에 대한 과정은 단순하다.
XYZ 씨는 지금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 말도 할 수 있고, 합리적으로 판단도 할 수 있는 상태지만, 다만 자기가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 다행인것은 이 기억은 정확히 1시간 후에 완벽하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명 중에 한 명은 빌 게이츠이고, 다른 한 명은 평범한 중산층이며, 마지막 한 명은 노숙자이다. XYZ는 지금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자신이 셋 중에 한 명일 것임을 알고 있다. 기억이 돌아오기 전에 롤스가 이들에게 묻는다.
이제 두 가지 중에 하나의 분배 방식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세금을 낮추고, 복지도 낮춰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세금을 높이고, 복지도 높여 빈부 격차를 해소하고, 최소 수혜자에게 혜택을 주는 것입니다. 어떤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롤스에 따르면, 세 명 모두 두 번째 분배 방식인 세금 인상과 복지 확대에 동의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노숙자일 것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빌게이츠여서 얻는 이익보다 자신이 노숙자일 때 처할 어려움에 더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롤스의 원초적 입장에 대한 사유 실험은 우리가 개인의 특수한 상황을 벗어났을 때, 사회 전체가 합리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분배 방식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해 준다. 최소 수혜자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는 사회가 사실은 구성원 전체가 동의할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롤스의 생각은 개인의 절대적 권리에 대한 고려보다는 결과적으로 다수가 합의할 수 있는 상황을 기준으로 한다는 점에서 목적론적 윤리설의 입장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의롭고 윤리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개개인이 납득하고 합의할 수 있는 결과를 고려해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해 재분배를 추진해야 한다.
. 과정과 절차에 대한 감시를 통해 공정한 게임이 가능하게 해야 할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결과를 도출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에필로그
현실 세계를 극단적으로 추상화하고 단순화하면 세계는 둘로 나뉜다
A 세계의 주인공은 소수의 지배자다.
역사에서 그들은 왕, 영주, 부르주아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생산 수단을 소유함으로써 노예, 농로, 프롤레타리아를 지배하고 권력을 유지해 왔다. 특히 근대의 부르주아는 공장과 자본을 소유함으로써 공급 과잉 문제를 일으켰으며, 이는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귀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에 들어서며 냉전과 신자유주의가 도래했다. 경제에서 초기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부르주아의 세계다. 그들은 시장의 자유를 추구하고, 정부의 개입을 반대한다. 이에 따라 세금 인하와 복지 축소가 진행된다. 세금 인하와 규제 완화는 부르주아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된다. 자본가의 투자 확대와 사회의 경제적 분위기는 경제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정치에서 보수는 자본가와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적 입장을 말한다. 생산 수단의 민영화, 정부 개입 축소, 세금 인하 및 규제 완화, 경제성장이 이들의 지향점이다. 정치적 의사결정에서 자본가는 소수이기 때문에 민주주의 체제보다는 독재나 엘리트주의 체제가 이들의 이익을 보장하는데 더 효과적이다.
사회에서 자본가가 소수라는 특징은, 이들의 권리가 노동자 다수에 의해 침해받을 가능성을 발생시킨다. 전체주의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근본 이념으로서의 자연권 특히 재산권의 절대적 보장은 자본가의 권리와 재산을 보호해 줄 근거를 마련한다. 또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미디어는 기업의 광고비를 통해 유지된다는 특성 때문에, 기업과 자본가의 이익을 지속적으로 반영할 수밖에 없으며, 이로 인해 보수적 견해를 반영하기 쉬운 조건에 놓였다.
윤리에서 의무론은 결과보다는 이미 주어진 의무와 도덕 법칙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윤리관으로, 개인의 권리와 인권을 강조한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신자유주의는 공정한 경쟁이라는 절차가 보장된다면, 그 결과로 빈부 격차가 발생하는 것은 문제시 하지 않는다. 결과가 아닌 절차나 과정의 공정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의무론적 윤리설이 신자유주의의 정당성에 대한 윤리적 근거를 제시하기에 적합하다.
B 세계의 주인공은 다수의 피지배자다
역사에서 그들은 노예, 농노, 프롤레타리아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했다. 특히 근 현대 역사에서 이들은 자신이 착취 당하는 상황을 직시하기 시작했고,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역사의 주인공으로 서려 했다. 그러나 냉전 이후 공산주의 붕괴와 함께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노동자의 계급을 유지하게 되었다.
경제에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 민주주의, 공산주의는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체제다. 이 체제들은 공통적으로 시장의 자유를 축소하고, 정부의 개입을 강화하려 한다. 이에 따라 세금이 인상되고, 복지가 확대된다. 정부에 의한 적극적인 복지정책 추진은 노동자와 서민에게 직접적 이익이 되고, 동시에 빈부격차를 완화한다. 다만 노동 의욕 감소와 자본가의 투자 의혹 감소가 장기적인 경기침체를 발생시킨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정치에서 진보는 이러한 노동자, 저소득자, 서민, 최소 수혜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적 입장을 말한다. 생산 수단 국유화, 정부 개입 확대, 세금 인상 및 규제 강화, 사회적 재분배가 이들이 지향하는 방향이다. 정치적 의사 결정에서는 노동자가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다수의 견해가 반영되는 민주주의가 이들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정치 체제가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역사적 경험, 미디어에 의한 교육, 대중의 비합리성으로 노동자가 스스로의 이익과 어긋나는 정치정당을 선택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사회에서 노동자가 다수라는 특징은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을 발생시킨다. 이렇게 다수에 의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부정적 상황을 전체주의라 한다. 근현대의 시기 동안 전체주의가 얼마나 폭력적으로 개인의 가치를 희생시킬 수 있는지를 경험한 인류는 전체주의를 부정적 개념으로 명확하게 규정했다. 이론적으로는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가 전체주의화함으로써 자본가의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자본가의 이익이 정치적으로 강력하게 지지되고 있다.
윤리에서 목적론은 행위의 결과가 행복과 쾌락이라는 이익을 발생시킨다면, 이 행위를 윤리적으로 평가하는 관점으로, 전체의 이익을 강조한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후기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재분배 중심 제도는 다수의 노동자와 서민의 만족을 높인다는 점에서 목적론적 윤리설에 의해 정당화된다.
세계를 양분함으로써 복잡한 현실 세계를 단순화했다. 극단적으로 단순화되고, 추상화된 세계는 대축적 지도와 같다. 지구 전체의 구조가 세계지도 한 장에 담기듯 이분화된 세계는 세계를 조망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미세한 구체성을 소거한 비현실적인 지도가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안내하듯, 현실의 복잡성을 단순화한 이 책이 지적 대화를 위한 교양 여행의 안내서가 되기를 기대한다. 세부적인 그림을 그려 넣는 것은 여행을 시작한 당신의 몫이다. 당신이 이 지도를 배낭에 넣고 인생의 여행길을 따라 여행하는 동안, 동행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대화하면서 그림을 완성해 나가기를 바란다.
September 13. 2024. Friday
Donsoo Han, sea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