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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히 사라지는 가능성들 (시)

한돈수 2025. 6. 26. 07:30




고요히 사라지는 가능성들

  -  February 2024. Donsoo Han,  Seamind


우리가 딛고 있는 이 현실이
과연 단 하나의 세계일까.
보이지 않는 시간의 이면엔
또 다른 내가, 다른 우리가
다른 길 위를 걷고 있을지 모른다.

이 순간조차
수많은 갈래의 문이 열리고
우리는 그 중 단 하나의 문턱을
무심히, 혹은 간절히 지나온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문은 닫히고, 길은 굳어지고
‘현실’이라는 이름 아래
다른 가능성들은
소리 없이 증발해버린다.

선택된 한 줄기의 시간은
굳건해지고, 굳어질수록
다시 무수한 가지를 낳는다.
그리고 그 끝마다
또다시 조용히 사라지는
수많은 나와 우리의 그림자들.

우리는 언제나
사라진 가능성 위에 서 있다.
지금 여기가 단 하나의 진실처럼
빛나고 있을 뿐.

그러나 어쩌면,
그 고요한 사라짐들 속에서만
진짜 나,
진짜 우리가
조용히 숨 쉬고 있는 건 아닐까.

아직 닫히지 않은
어딘가의 문틈 너머에서
다른 나의 발자국 소리가
아득히,
들려오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