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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영의 존재 (시)
한돈수
2025. 6. 29. 09:11

숫자 영의 존재
- April 2024. Donsoo Han, Seamind
숫자는 존재를 설명한다.
1은 어떤 것의 탄생을,
9는 그것의 완결을 말하지만,
0은 존재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가능성으로 침묵한다.
홀로 있을 땐 공허와 닮았지만,
다른 수의 곁에 설 때
그것은 수의 본질을 확장시키고,
가치의 체계를 뒤흔든다.
삶에도 그러한 것이 있다.
침묵—말을 멈추었기에 열리는 귀
멈춤—흐름을 끊기에 보이는 진실
잊음—무게를 비워낸 기억의 정화
용서—상처를 무화시키는 의지
죽음—끝이 아니라 형태 없는 존재의 귀결
이들은 모두 숫자 0처럼
비어 있는 듯하지만,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삶을 다시 계산하게 만든다.
0이 있기에
음의 세계도, 대칭의 구조도 가능하며
0이 있기에
우리는 언제든 기점으로 돌아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아닌 것’ 속에서
모든 것을 품은 것을 보라.
숫자 영은
무(無)가 아니라,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침묵의 기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