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이 어머님과 1953년 10월 10일에 결혼하시고 1956년11월부터 경기도 여주 흥천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시작하셨다. 내가 태어난 것은 1957년 7월, 갓난아기 시절 흥천국민학교의 여교사 두분이 나를 많이 업어 주셨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때의 어머님 모습과 여선생님의 모습은 전혀 기억 속엔 없다.
내 기억 속에 어머님이 존재하는 건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상현리 가산의 초갓집부터이다. 그 집의 바깥 마당의 산쪽 한켠에 조그마한 샘물 우물이 있었고 그곳이 기원이 되어 도랑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곳은 우리집의 빨래터이기도 했다.
내가 말도하고 듣기도했고 조금은 뛰기도 했던 나이로 기억된다. 어머님은 우물에서 빨래를 하고 계셨고 어린 난 바깥 마당의 어머님 반대편에서 무엇인가는 생각나지 않지만 불만에 쌓여 바닥에 철썩 주저앉아 발버둥치고 울면서 땡깡을 피우고 있었다. 어머니는 모르는 척 빨래하시는데만 열중하고 계셨다. 그런 어머니가 그토록 미워서 그 작은 나는 넘지 못할 선을 넘어 버렸다. 어머님께 욕을 했던 것이다. 그런후 난 엄청난 잘못에 대한 반성을 하고 앞으로 욕은 하지 않기로 자신과 약속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때의 엄마 얼굴은 기억에 없다. 단지 빨래에 열중하시던 옆모습과 나의 잘못만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중학교 2학년때 수원 영화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난 가산집에서 살았다.
그시절 엄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이쁘고 착한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보통때는 밭에서 일하시고 부억에서 밥하시고 사남매가 어지른 이곳 저곳 치우시느라 한없이 바쁜 엄마이셨다. 그리고 돈을 마련하기위해 4~5키로나 되는 수원으로 직접 키운 오이, 가지등을 갖고가 시장의 길거리에서 팔고 오시곤 했다. 수원에서 늦게 돌아오시는 날엔 주위는 어두컴컴해지고 우리 사형제는 무서워 집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마당에서 놀거나 이백미터가량 떨어진 버스다니는 길의 정류장까지 갔다 왔다 하면서 애타게 엄마를 기다리곤 했다. 또 그집에는 전기가 없어서 환한 환경에서 책을 보라고 형광등을 켜기위한 무거운 베터리를 수원에서 충전해서 갖고 오시기도 했다. 참으로 근면하고 인내심이 강한 어머님이셨다. 하지만 학교에서 부모님 소집이 있는 날이면 엄만 오래간만에 머리 고대를 하시고 화장도 하셨다. 그 모습은 어린 나에겐 이 세상 최고의 미인이었다. 멋지단 표현은 어울리지 않고 아릅답다란 표현이 어울리는 미인....
내 눈에 어머님이 이세상 최고의 미인으로 남아 있었던건 중학교 시절까지 였다.
그 후로 사춘기가 오면서 미인이라는 개념보다는 부모로서의 어머님, 언제나 나를 생각해주시고, 걱정해주시고, 내 편이되어 주시는 든든한 인생의 동반자로서의 개념으로 변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머님, 아버님은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내 나이 예순 셋, 어머님이 저세상으로 가시고 나니, 난 어머님께 해드린 것이 하나도 없는 불효자로 덩그러니 남아 있는데, 어머님은 나에게 모든 것을 주기만 하시다가 하염없는 이별통보를 하시고 가신 느낌이다.
엄마
이 세상 이렇게 잘 살 수 있도록 항상 걱정해주시고 사랑해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저 세상에 계신 어머님께 걱정끼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 갈께요.
그리고 생전 쓰시지도 않고 통장에 남겨 놓으신 돈 모두 찿아 우리 사남매 나누어 가졌어요. 용돈도 제대로 못드렸는데 이렇게 돌아가시면셔도 저희들에게 주시기만 하네요.
정말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20201202. 수요일 새벽
큰아들이 어머님을 생각하며 적었습니다.
내 기억 속에 어머님이 존재하는 건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상현리 가산의 초갓집부터이다. 그 집의 바깥 마당의 산쪽 한켠에 조그마한 샘물 우물이 있었고 그곳이 기원이 되어 도랑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곳은 우리집의 빨래터이기도 했다.
내가 말도하고 듣기도했고 조금은 뛰기도 했던 나이로 기억된다. 어머님은 우물에서 빨래를 하고 계셨고 어린 난 바깥 마당의 어머님 반대편에서 무엇인가는 생각나지 않지만 불만에 쌓여 바닥에 철썩 주저앉아 발버둥치고 울면서 땡깡을 피우고 있었다. 어머니는 모르는 척 빨래하시는데만 열중하고 계셨다. 그런 어머니가 그토록 미워서 그 작은 나는 넘지 못할 선을 넘어 버렸다. 어머님께 욕을 했던 것이다. 그런후 난 엄청난 잘못에 대한 반성을 하고 앞으로 욕은 하지 않기로 자신과 약속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때의 엄마 얼굴은 기억에 없다. 단지 빨래에 열중하시던 옆모습과 나의 잘못만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중학교 2학년때 수원 영화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난 가산집에서 살았다.
그시절 엄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이쁘고 착한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보통때는 밭에서 일하시고 부억에서 밥하시고 사남매가 어지른 이곳 저곳 치우시느라 한없이 바쁜 엄마이셨다. 그리고 돈을 마련하기위해 4~5키로나 되는 수원으로 직접 키운 오이, 가지등을 갖고가 시장의 길거리에서 팔고 오시곤 했다. 수원에서 늦게 돌아오시는 날엔 주위는 어두컴컴해지고 우리 사형제는 무서워 집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마당에서 놀거나 이백미터가량 떨어진 버스다니는 길의 정류장까지 갔다 왔다 하면서 애타게 엄마를 기다리곤 했다. 또 그집에는 전기가 없어서 환한 환경에서 책을 보라고 형광등을 켜기위한 무거운 베터리를 수원에서 충전해서 갖고 오시기도 했다. 참으로 근면하고 인내심이 강한 어머님이셨다. 하지만 학교에서 부모님 소집이 있는 날이면 엄만 오래간만에 머리 고대를 하시고 화장도 하셨다. 그 모습은 어린 나에겐 이 세상 최고의 미인이었다. 멋지단 표현은 어울리지 않고 아릅답다란 표현이 어울리는 미인....
내 눈에 어머님이 이세상 최고의 미인으로 남아 있었던건 중학교 시절까지 였다.
그 후로 사춘기가 오면서 미인이라는 개념보다는 부모로서의 어머님, 언제나 나를 생각해주시고, 걱정해주시고, 내 편이되어 주시는 든든한 인생의 동반자로서의 개념으로 변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머님, 아버님은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내 나이 예순 셋, 어머님이 저세상으로 가시고 나니, 난 어머님께 해드린 것이 하나도 없는 불효자로 덩그러니 남아 있는데, 어머님은 나에게 모든 것을 주기만 하시다가 하염없는 이별통보를 하시고 가신 느낌이다.
엄마
이 세상 이렇게 잘 살 수 있도록 항상 걱정해주시고 사랑해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저 세상에 계신 어머님께 걱정끼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 갈께요.
그리고 생전 쓰시지도 않고 통장에 남겨 놓으신 돈 모두 찿아 우리 사남매 나누어 가졌어요. 용돈도 제대로 못드렸는데 이렇게 돌아가시면셔도 저희들에게 주시기만 하네요.
정말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20201202. 수요일 새벽
큰아들이 어머님을 생각하며 적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