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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법륜 스님)을 읽고

한돈수 2021. 8. 9. 01:28



나는 길가에 핀 풀 한 포기와 같다.
자신이 별 게 아닌 줄 알면 상처받을 일이 없다.
특별한 존재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인생이 괴롭고,
그 때문에 결국 특별하지 못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가는지 알고 가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그 길이 죽는 길이라면 아무리 모든 사람들이 간다 해도 나는 가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힘을 다해 달린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 해도 그만두고 돌아서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살길이 열린다.

옳고 그른 것이 본래 없고 다만 서로의 생각이 다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나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게 된다.
내 고집을 버리면 내 괴로움이 사라진다. 지금 갖고 있는 내 기준을 버려야 한다. 다 버리지 않으면 눈을 뜰 수 없다. 버리면 분별이 사라지고 번뇌가 사라지고 정신이 맑아진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만의 고정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생각과 필요에 따라 그 가치가 그때 그때 정해질 뿐이다. 존재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기에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다.
일체의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확연히 알면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말이다.
존재로 부터 진정 자유로운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어떠한 상황이 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싫다, 좋다 '는 내 생각이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속박하고 있다. 좋다, 싫다는 관념에 휩싸여 있는 한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일의 시작은 언제나 나로부터 출발한다.

조건이 좋은 날이든 나쁜 날이든 그 매일매일이 모여 내 인생이 된다. 불행은 늘 사람들 스스로가 만든다. 즉, 주어진 자기의 현실을 외면 하는 데에서 불행이 싹튼다.
언제나 지금 이대로 좋은 삶이어야 한다. 그래야 나를 괴롭히는데 내 에너지를 쓰지 않게 된다.
자기를 아낀다는 것은 자기를 괴롭히지도 속박하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이 병이 밖에서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깨우치는 순간 마음의 병은 단박에 낫는다. 나를 괴롭히는 모든 괴로움에서 즉시 벗어날 수 있다.

괴로움의 바다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간단하다. 괴로워할 만한 그 어떤 것도 본래 없다는 이치를 알면 된다.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괴로움이 생겼으니, 본래 옳고 그른게 없다는 걸 알고 그 자리에서 놓아 버리면 괴로움은 즉시 사라진다. 그럴때 편안함과 행복, 자유의 길이 열린다.

참회는 너와 나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옳고 그르다는 것이 본래 없음을 자각하는 것이 참회다.
'내가 생각을 잘못해서 당신을 미워했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참회의 길이다. '당신이 잘하고 내가 잘못했다.'는 마음으로 참회하면 억울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수행은 자기를 온전하게 살리는 길이고, 무엇이라고 나를 모양 짓지 않는 길이다. 내가 길가에 핀 한 송이 꽃처럼 특별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알면 어디가서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고 무슨 일을 해도 아무런 불편 없이 잘 살 수 있다.

남들이 자꾸 불러주고 떠받들고 공경하고 대접해 주면 자기가 마치 무슨 대단한 존재인 양 착각하게 된다. 그러면 자기의 방어벽이 더 단단히 쳐지고, 결국 자기만 손해고 불행해진다. 자기를 아낄 줄 모르는 사람은 그런 어리석음에 쉽게 빠진다.착각하는 순간, 인생은 불행해진다.

모든 현상은 그저 하나의 사건일 뿐 거기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면 거기에는 괴로워할 만한 것이 없다. 다만 그것을 보고 내가 괴로워하거나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킬 뿐이다. 그러니 자기 마음을 잘 관찰해야 한다.

어떠한 전제나 목적을 두지 않고 '그냥 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렇게 할때 비로서 괴로움과 즐거움의 윤회가 끊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되풀이 된다.
손에 든 컵이 뜨거운 줄 알면 바로 그냥 놓듯이,  꿈인 줄 알면 바로 그냥 깨어나면 된다. 준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즉시 행하면 된다.  바로 지금 일어나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내려놓으면 된다.
그렇게 하고 안하고는 모두 자신의 뜻이다.

내개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은
'모든 것이 내 탓이고, 내가 지은대로 돌아온다 '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내 인생 내가 책임겠다는 생각을 하면
이미 부처의 길로 한 발 다가간 것이다.

빨갛게 달구어진 쇠공이 예뻐서 손에 쥐었다가도 그 쇠공이 뜨거운 줄 알면 '앗 뜨거!' 하면서 즉시 손을 뗀다. 그런데 사람들은 뜨거운 쇠공을 갖고 싶은 마음과 그 쇠공이 뜨겁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이 두가지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쇠공에 대한 집착 때문에 뜨거운 쇠공을 다른 손으로 옮겨 집는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한 손은 뜨거움에서 벗어나지만 다른 손이 또 뜨거워질 뿐리다. 진정한 해결책은 욕망의 불덩이를 내려놓는 것이다.

고통은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는 게 아니다. 고통은 내가 지은 인연따라 일어난다. 지은 인연의 과보는 어느 곳에 숨는다 해도 피할 수 없다.
어떤 원인과 조건으로 결과가 왔다는 것을 알면 세상에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된다.

몸 자체는 무자성이라 본래 성품이 없다. 연관해서 성품이 일어나고 연관이 끊어지면 그 성품도 사라지는 것이지, 본래 고정된 단독적이고 불변하는 어떤 성품이란 것은 없다.
내 몸 자체는 성품이 없다. 아내와 연관되어야 남편이 되고, 자식과 연관되어야 아버지가 된다.
이상태는 결코 영원하지 않다. 인연이 다해 흩어지면 그 성품은 사라진다. 인연따라 살다가 인연따라 세상을 떠나가는 것이다.
내 생각, 내 육신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존재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와 같이 인연 소생(연기)한다.

사람들이 맺는 관계 중 가장 이기적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부부 관계다. 친구는 의리를 보고 사귀고, 사업 동업자를 고를 때는 신용을 따지는데, 결혼할 때에는 이해타산의 명세서가 수도 없이 많아진다. 그렇게 욕심과 이기심으로 온갖 것을 챙기면서 결혼하니 좋은 인연을 만나기 힘들다. 결혼하려면 욕심을 버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수행부터 해야 한다.

인연을 지을 때에는 좋은 인연을 지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이미 맺은 인연에 대해서는 좋네 나쁘네 분열하지 말고 좋은 방향으로 잘 풀어야 한다.
깨달음의 길에는 좋고 나쁜 인연이 없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은 '이 모든 것이 다 내 탓이고, 내가 지은 바대로 온다'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내 인생 내가 책임지겠다는 생각을 하면 이미 부처의 길로 한 발 다가간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내 책임이다, 내 인연으로 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기도할 때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보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내 앞에 놓인 장벽이 무너진다. 장벽이 무너지면 가려져 있던 실상이 여실히 드러나므로 어떠한 문제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

사랑이 왜 미움이나 슬픔으로 바뀌는가?
상대에 대한 이해가 아닌,
상대를 자기 식대로 소유하려는 아집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은 아주 쉽게 고통으로 바뀐다.

깨달음은 좌선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얻을 수 없다. 마음을 돌이킬 때 그것이 진정한 좌선이고 염불이다. 그런 마음속에서 깨달음의 길, 부처의 길은 열린다.

꼭 대단한 능력이 있어야만 스승이 되는 게 아니다. 내가 그를 믿으면 그는 곧 내 스승이 된다. 아무리 훌륭한 분이라도 내가 믿는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면 그는 나에게 아무 능력도 영험도 없는 존재일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복과 재앙을 따로 구별하지만, 깨어있는 사람은 세상 어떤 일에도 재앙과 복을 따로 생각하지 않는다. 깨어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칭찬한다고 우쭐대면 그것이 재앙으로 돌아오기 쉽다는 것을 안다. 또 다른 사람의 비난에 자기를 깊이 돌이키면 그것이 도리어 큰 복이 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현재에 깨어 있는 사람이다.

현재 자신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하면 그다음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사람들은 흔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과거에 선택을 잘못했음을 깨닫는다. 그 이유는 그때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신발 벗을 때, 마음이 신발 벗는데 있지 않고 방에 먼저 가 있으면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게 된다.  이는 내가 현재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네 발 밑을 보라'고 한다.

갈등이 생기면 우선 상대방의 처지에 서서 보라. 상대편 처지에서 보지 못하면 절대 객관적이 될 수 없다. 객관적이라는 것은 자기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가 이해되면 화해하는 것이고, 아무리 살펴봐도 이 점만은 꼭 해결해야겠다고 생각되면 해결하면 된다.

현재에 항상 깨어 있기는 참 어렵다. 사건이 생기면 저도 모르게 거기에 휘말리고, 한참을 지나서야 알아차리고 후회한다. 당시로서는 정말 큰일이었던 일도 지금 와서 보면 별것 아닌 일로 느껴지는 것이 많다. 그러니 지금 닥친 큰일도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보면 별것 아닌 일일 수도 있음을 미리 짐작해 볼 수 있다. 즉, 과거를 돌이켜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바라 보는 것이다.
또 나에게는 이 일이 큰일이지만 제3자의 시각으로 보면 별것 아닌 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내일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즉, 공간적으로는 넓게 보고 시간적으로는 길게 보자는 것이다.

지혜란,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보고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사물을 긴 호흡의 관점에서, 주관적 이해관계가 아닌 다른 사람의 처지까지 확대해서 보는 넓은 안목을 가져야 한다. 바르게 볼때 비로서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 이것이 인생을 바르게 사는 근본 바탕이다.

범부 중생은 주변 환경에 쉽게 물든다. 맹자 어머니가 아들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람들은 좋은 물 보다는 나쁜 물에 쉽게 물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좋은 것이라 해서 특별히 배우기 어려운 건 아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행동하면 당연히 따라 배워 그렇게 하게 된다.

우리가 '이사람은 이러저러해서 좋고 사랑하지만, 저 사람은 이러저러해서 싫고 밉다'라고 할때, 이 정반대의 감정은 근본에서는 같다. 그 근본은 요구다. 사람들은 자기 욕구를 만족시키면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싫어한다. 동전의 양면처럼 근본 뿌리에서 보면 애증은 같은 것이다.

경계 속에 있으면서도 물들지 않는 사람은 상황을 피해서 물들지 않는 게 아니라 상황 안에 있으면서도 그 상황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다. 적어도 이 단계에 이르러서야 자유를 말할 수 있다. 온갖 욕망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을 경계에 속박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단계는 욕망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경계로 부터 자유롭다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것 또한 완전한 행복, 완전한 자유는 아니다.

세상을 물들이는 사람이란, 물들까 봐 겁내지도 않고, 물들지 않는 걸 능사로 여기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사람이다. 자기를 더럽혀서 더러운 때를 닦아내는 걸레처럼 스스로 걸레가 되어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어 버리는 사람이다.

자기 인생길이 뚜렸한 사람보다 한 수 위의 사람은
형상없는 물이 그릇따라 모양을 바꾸듯이 뭘 해야 한다는 고집 없이 상대와 인연에 따라 상응하는 사람이다.
모르는 것, 틀린 것, 잘못한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다. 모르면 물어서 알면 되고, 틀린 줄 알면 고치면 되고, 잘못한 줄 알면 참회하면 된다.

진정한 자유는 어떠한 조건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
얻을 것이 없음을 알아, 얻으려는 생각을 놓아버린 사람은 완전한 자유인이다.
무애의 단계가 되면 바다에 빠질 자유와 빠지지 않을 자유를 동시에 누리게 된다. 파도가 쳐서 바다에 빠지면 빠진 김에 조개를 주울 자유를 누리고, 빠지지 않으면 배를 타고 놀 자유를 누리면 된다. 걸림 없는 자유란 이러한 자유를 말한다. 이런 자유는 누가 뺏을수도 줄 수도 없다.

한 생각 일어나니 만법이 일어나고,
한 생각 사라지니 만법이 사라지네.
일체가 다 마음이 짓는 바 이거늘....

똑같은 일을 두고 한쪽은 통곡하고 다른 한쪽은 축배를 드는 모습에서 삶의 모순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삶이 도깨비 장난과 같은 것이다.

바라는 마음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진정한 이익을 볼 수 있다. 바라는 마음을 버리는 열가지 수행을 놓치지 않는 다면 세상살이에 겁날 게 없으며
어느새 자유로운 사람이 된 자신과 만나게 될 것이다.

바라는 마음을 버리는 열 가지 수행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장애)없기를 바라지 말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말라.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막히는 곳에서 도리어 통하는 것이요, 통함을 구하는 것이 오히려 막히는 것이니....
역경을 통하여 부처를 이룰지어다.

곤란이 자기를 돌이켜보는 좋은 계기가 된다. 곤란은 수행자에게 참으로 큰 스승이다.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나를 돌이켜볼 수 있을 때, 근심과 곤란은 오히려 세상을 살아가는 좋은 길잡이가 된다.

파도는 다만 출렁거릴 뿐 입니다. 파도가 일어난다고 좋은 것도, 사라진다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장애가 있어야 그로부터 벗어나는 기쁨, 해탈의 기쁨도 맛볼 수 있습니다.

일이 쉽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욕심이고 집착이다. 일을 빨리 끝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조급해지고, 마음이 조급하므로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닦달하고 독촉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 마음을 억압하고 불편하게 한다.

내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괴로움이 있다면,  비록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아도 상대에게서 이롭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잘못 맺은 관계라 함은 내가 이롭고자 하는 마음으로 맺은 관계다. 내가 이롭고자 하는 마음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의리를 상하게 하니, 상대를 도와주고 이해하려는 태도로 전환할 때, 사귐은 길게 되고 그 사귐 속에서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내가 옳다는 생각으로 상대의 잘못을 따지거나 책망하고 훈계하는 태도로는 결코 누구와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 뜻을 맞춰 나가는 자세, 뜻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교만을 없애는 최고의 수행이다.

공덕을 바라는 마음은 뭔가를 도모하기 때문에 반드시 괴로움을 동반하게 된다. 무엇인가를 바라면서 베풀었기 때문에 내 뜻에 차지않는 대가가 돌아오면 원망심이 생기는 법이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닌 줄을 알면 괴로운 문제가 사라집니다.

원망하는 마음을 푸는 방법은 그 원망을 버리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 대상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괴롭다. 따라서 미워하는 마음을 버릴 때 그 즉시 내 마음이 편해진다.
억울함을 당할 때마다 '나를 수행시키려고 그러는 구나'하고 받아들이면 괴로움에서 쉽게 헤어날 수 있다.

내 의식 속에 세상이 있고, 세상 속에 내가 있으므로
세상을 좋게 만드는 것과 내가 깨닫는 것은 분리될 수 없다.

삶의 조건이 어떻든 세상이 어떻든 자연환경이 어떻든 일단 내 관념을 내려놓으면 내려놓는 순간 내 마음이 가벼워진다.
세상이 아무 변화도 없고 조건이 바뀐 것도 아니지만 내가 고집하던 것을 내려놓는 순간 마음이 고요해진다.

깨달음이 계속되려면
첫째,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 욕심을 버리면 마음이 깨끗해진다.
둘째, 마음이 밝아야 한다. 정에 얽매이지 않으면 마음이 밝아진다.
셋째, 마음이 가벼워야 한다. 자기가 일으키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마음이 가벼워진다.
이러한 맑은 마음을 생활 속에서 늘 간직해야 한다.